2023/12/31 23:59

2023 대문짝 객관성 담보 불가


2023년의 주요 타겟


교섭 / 유령 / 바빌론 / 퀀텀매니아 / 서치2 / 샤잠! / 이니셰린 / 빛의 제국 / 던전&드래곤 / 킬링 로맨스 / 존윅4 /
슈퍼 마리오 / 1승 / 랜필드 / Vol.3 / 스파이더버스 / 드림 / 플래시 / 비스트 워즈 / 인디5 / MI7 / 피랍 / 오펜하이머 /
거룩한 밤 / 바비 / 엘리멘탈 / 크레이븐 / DUNE / 웡카 / 로스트 킹덤 / 마블스 / 파묘 / 콘크리트 유토피아 / 블루 비틀 /
노량 / 서울의 봄 / 원더랜드

2023/03/17 16:51

스즈메의 문단속 극장전 (신작)


사람들은 이 영화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만든 재난 3부작의 마지막 편이라 말한다. 확실히 그랬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는 개별 작품의 호오를 떠나 모두 재난의 범주 안에서 움직였고, 그건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러 더 확실해진다. 이세계로부터 열린 문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로 비집고 들어오는 대지진 유발의 존재들. 그리고 그걸 막으려 열도를 종횡무진하는 한 소녀의 로드 무비. 생각해보면 특이하다. 신카이 마코토의 훨씬 이전작들인 <초속 5센티미터>와 <별을 쫓는 아이>, <언어의 정원>들은 재난을 주 소재로 삼지 않았었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그 사이, 신카이 마코토에게는 어떤 지진이 일어났던 것일까.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혔듯, 그를 관통한 건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었다. 열도를 뒤흔들고 그 주변 국가들에게 역시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던 큰 사건. 추산된 것으로만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던 그야말로 대지진이었다. 

그 이후 착수한 <너의 이름은.>부터 2011년의 대지진 영향을 받았다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말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최신의 결과물인 <스즈메의 문단속>은 한 예술가가 실존 했던 현실의 사건을 투영하는 과정을 직접 목도하는 아름다운 경험이다. 걔중 인상적인 것은 역시 '문'이라는 소재일 텐데, 보통의 판타지 영화에서 '문'이라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이어주는 일종의 '시작'을 의미하는 오브제로써 주로 활용된다. <오즈의 마법사>가 그랬고 <나니아 연대기> 역시 그랬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문'을 그렇게 활용하는 동시에 '이뤄지지 못한 소박한 약속'에 대한 인사로써 은유하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실제로 많이 쓰는 문장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인인 우리 입장에서도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일어 "行きます"는 숱한 일본 영화나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접해봤기에 그리 어색한 인사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이 주로 발화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 곳이 바로, '문'의 앞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상적이면서도 소박하고, 그래서 짐짓 당연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작은 인사들이 그 큰 재난에 의해 얼마나 많이 지켜지지 못했을까-를 고찰한다. 영화 속에서나 밖에서나, 그 사건 직전의 사람들은 문을 열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잘 다녀 와"라고 화답 했을 것이고. 그러나 문 밖으로 나간 자들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더불어 문 안에 남아있던 자들 역시 그들이 남겨둔 그 약속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래서 스즈메는 듣는다. 지진 요괴 미미즈가 튀어나오는 문을 막을 때마다 매번 들리는 스러져간 사람들의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렇게 실제 사건으로부터 상처를 입었던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만한 어떠한 것을 조그마하게 사근 거려 준다. 

영화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중반부 도쿄 상공 장면이 너무 스펙터클해 그 지점이 일종의 클라이막스처럼 여겨진다. 때문에 그 이후 영화의 나머지 절반은 쓸데없는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덩달아 그 후반부 전개가 늘어지고 뻔한 건 덤. 여기에 제아무리 첫눈에 반했다 한들, 알고 지낸지 얼마 안 된 소타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마지막 모험을 결정하는 스즈메의 모습 역시 쉽사리 납득이 가질 않고. 살다보면 그렇게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우리네 인생 모든 요소들이 어찌 다 설득력을 갖고 일어나겠나 싶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건 픽션 아닌가. 그렇다면 작품의 이야기 내에서 최소한 관객들을 설득할 정도로 그걸 건드리긴 했어야지. 

그럼에도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 비로소, 신카이 마코토는 대지진의 상처를 적어도 본인 스스로 아물어낸 듯 보인다. 다음 작품에서는 이제 조금 지진과 재난을 벗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 

2023/03/11 22:11

똑똑똑 극장전 (신작)


중국에서 딸을 입양해 키우고 있는 게이 부부 에릭과 앤드류는 휴가를 맞이해 숲속 외딴 곳에 있는 오두막을 찾는다. 그런데 세 가족만의 단란한 시간도 잠시, 우락부락한 사내와 그가 이끄는 다른 세 명의 침입자 집단에 의해 가족은 위기를 맞고 오붓한 시간을 위해 찾았던 오두막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공포를 선사하며 그들을 말그대로의 지옥으로 이끈다. 

한 개인의 희생으로 전체 공동체를 구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를 선뜻 받아들일 것인가? 이는 그동안 여러 다른 형태의 이야기들로 변형되어 왔을 뿐, 언제나 줄곧 우리 곁에 있던 오래된 딜레마였다. 개인 vs 공동체, 소수 vs 다수, 그리고 희생과 생존. 이 오래된 딜레마는 각종 신화와 민담, 종교 등의 형태를 거쳐 지금껏 우리와 함께 해왔다. 그리고 <똑똑똑>이 이를 이어받는다. 종말의 소식을 들고 외딴 곳까지 한 가족을 찾아온 묵시록의 네 기사들. 비록 위협적인 무기를 들고 그 가족의 오두막에 무단 침입한 것은 맞지만. 또, 완력으로 그 가족들을 제압하고 의자에 꽁꽁 묶어둔 것 역시 맞지만. 그 직후, 묵시록의 네 기사는 그 이상의 무력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들고 온 무기를 에릭과 앤드류에게 휘두르지 않고, 오로지 간절한 설득의 말로써만 그들을 대한다. 꿈에서 봤어요. 서로 사랑해마지 않는 당신들 셋 중, 한 명이 선택되고 희생되어야 해요. 그러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할 거예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우리 넷 모두, 비슷한 시기 똑같은 꿈을 꾸었답니다. 그러니까 제발 선택해주세요.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해, 당신들 중 누구를 죽일지. 제발요.

주인공 가족의 구성원이 눈에 띈다. 왜 하필 동양인 소녀를 입양한 게이 부부의 이야기일까. 이것도 그저 할리우드식 정치적 올바름의 가장 최신 예제일 뿐인 것일까? 그냥 이성애자 부부일 수도 있었잖아? 그냥 백인 부부가 입양한 백인 소년일 수도 있었잖아? 하지만 이같은 의심은 <똑똑똑>이 다루는 핵심 딜레마 앞에서 허물어져 버린다. 오히려 이 정치적 올바름이, <똑똑똑>의 그 핵심 딜레마에 더 깊은 자국을 남기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가장 차별받는 존재, 전인류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에서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존재, 심지어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종교에서 마저 배척받는 존재. 그런 존재가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중차대한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 심지어 그 딜레마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신화적인 동시에 다분히 종교적이다. 너무 사랑해서,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잃고 희생을 한다. 게이로서 에릭과 앤드류가 지닌 정체성은 그들을 그 신화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딜레마 안에서 더욱 영웅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어준다. 

이렇듯, <똑똑똑>은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다.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해볼만한 딜레마를 재기 넘치게 엮어놓았고, 또 주조연을 막론하고 좋은 캐스팅을 해 연기적으로도 보는 맛을 높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딱 거기까지더라. 다루고 있는 딜레마 자체는 흥미롭지만 그걸 장르적으로 잘 풀어냈느냐는 글쎄올시다.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다루는 스릴러로써 첫 인상을 박는 영화인데, 그 부분이 썩 무섭지가 않았다. 물론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그 침입자들이 진짜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울고 불고 하며 설득하려는 태도로 무장 했으니 거기서 공포 끌어내기도 쉽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거야 만든 사람들이 변명해야할 부분이고, 관객 입장에서야 안 무서웠다고 하면 끝인 것.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며 호기심을 자아낸 부분은 분명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냥 전형적인 샤말란식 괴담처럼만 느껴졌다. 원작이 있다고는 들었다. 그런데 어쨌든 샤말란이 그 원작을 선택해 각색하고 연출한 것이잖나. 그럼 이렇든 저렇든 간에 샤말란식 테이스트가 어떻게든 들어간 건 맞는 거지. 최근 <올드>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디어 자체는 솔깃한데, 막상 보고 나면 그냥 저냥인 느낌. 아이디어만 놓고 보면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 같아 기대가 되는데, 막상 본 뒤에는 다이소나 모던 하우스에서 산 것 같은 퀄리티의 느낌이라고 하면 맞을라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마냥 나쁘다는 건 아니고. 원래 다이소나 모던 하우스에서 사는 물건들도 아기자기한 재미 정도는 있잖나. 

2023/03/11 19:15

콜 제인 극장전 (신작)


유능한 검사인 남편과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듯한 딸을 데리고 짐짓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이. 그러나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울혈성 심부전으로 인해 산모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위기에 봉착한다. 뱃속의 아이도 소중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대로라면 산모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이에 조이의 담당 의사는 병원 간부들을 설득해 낙태 시술에 대한 허가를 받아보겠다 말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 제안은 산모야 죽든 말든 건강한 아이를 낳아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진짜 애국 아니겠는가-라는 사고방식으로 단단히 무장된 듯한 남성 중심 병원 간부들에 의해 반려 당한다. 그렇다고 목숨을 담보로 걸 수는 없는 일. 눈 딱 감고 계단 위에서 구를까도 생각했던 조이는 어느 날 우연히 제인에게 전화 하라는 전단지를 보게 된다. 그 전단지 한 장이 그녀 삶 전체를 뒤흔들 거란 것도 모른채. 

<콜 제인>은 1960년대와 70년대 실제 미국에서 암약 했던 여성 중심의 낙태 수술 및 알선 조직을 그려낸다. 낙태와 낙태 조직... 이것이 실화인지 아닌지를 떠나, 어쩌면 당신은 벌써부터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낙태는 논쟁적인 소재이기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낙태가 논쟁적인 소재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또 맞다 생각한다. 낙태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은 매우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낙태 찬성론자들은 산모가 자기 자신의 몸과 그 권리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역시나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낙태 반대론자들은 뱃속의 아이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뿐 하나의 인간이고 인격체이기에 그 목숨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말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본 당신들이 낙태에 대해 찬성 하는지 반대 하는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찬성론자와 반대론자의 이야기 모두 일견 일리 있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낙태 문제는 어렵고 헷갈린다. 그리고 이것은 산모와 뱃속의 아이, 최소 두 명의 목숨을 두고 논쟁하는 일이기에 어렵고 헷갈리는 것이 응당 옳아 보인다. 

그러니까 영화가 주 소재로 다루고 있는 '낙태'라는 개념이 매우 논쟁적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 그거 하나만 인정하고 넘어가자. 그렇담 그 다음은? 나는 <콜 제인>이 낙태를 찬성하는 영화든, 또는 반대하는 영화든 상관 없었다. 그저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내가 혼자서는 감히 도달하지 못했을 나와 완전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마음을 공감하게만 만들어줬다면 그 뿐이었다. 영화가 낙태 찬성을 부르짖었든, 아니면 그 반대를 부르짖었든 간에 나는 참고만 조금 할 뿐 그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진 않았을 거라 자신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콜 제인>은 이상한 길을 엇박자로 따라감으로써, 관객들에게 스스로를 오해할 구실을 만들어주고야 만다. 일단, 영화는 조이의 안타까운 상황과 더불어 다른 여성들의 사연 또한 짚어주며 낙태의 어쩔 수 없는 필요성에 대해 관객들을 설득하려 한다. 극중 인물들도 말하지 않나. 어떤 여자는 강간 피해자라 낙태를 해야하고, 또 다른 어떤 여자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낙태를 해야하며, 더불어 또다른 어떤 여자는 조이처럼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 낙태를 해야한다고. 설사 당신이 강경한 낙태 반대론자라 해도, 영화 속 이같은 사연들을 들으며 마냥 단호하게만 굴 수는 없을 것이다. 고로 여기까지는 영화가 낙태의 필요성에 대해 올바른 묘사를 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어느 순간, 조이는 낙태 시술이 생각보다 쉬운 무언가임을 깨닫고 본인이 직접 그를 집도하기에 이른다. 물론 조이가 정식 의사 면허를 딴 건 아닌지라 처음엔 버지니아와 조직의 다른 멤버들도 반대하지. 그러나 상술했듯 낙태 시술을 꼭 필요로 하는 여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버지니아와 다른 멤버들도 그런 여성들을 우선해줄 거라 약속하며 조이의 시술 집도를 허락 해준다. 

헌데 조이의 첫 집도 대상이 누구로 설정되어 있는가. 조이가 낙태를 도와주게 되는 첫 산모는 강간 피해자도 아니고 임신에 목숨이 걸린 여자도 아니다. 유부남과 알면서도 바람을 피우며, 피임을 의도적으로 하지도 않은채 이미 이 조직과 낙태를 경험해본 바 있었던 한 어린 여자가 조이의 첫 집도 대상이 된다. 물론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든, 그녀에게도 자신의 몸과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가 있다. 낙태를 몸의 권리에 대한 하나의 조건으로 본다면 그녀 역시도 낙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 영화로써 이러한 <콜 제인>의 선택은 의문만을 남긴다. 낙태를 찬성하는 톤의 영화이면서, 주인공의 첫 낙태 시술 집도 대상이 하필 그녀라고? 그것조차 실제 이야기의 한 요소였든 아니었든 간에, <콜 제인>의 이러한 선택은 관객들이 마냥 따라갈 수만은 없게 만들어버린다. 아, 아니면 첫 집도에서 조이가 실수할 수도 있으니 일종의 마루타로서 그녀를 선정한 것일까? 그럼 그거대로 또 문제 있는 묘사인데?

이뿐만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은 낙태를 찬성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의사 면허도 없는 이가 불법적으로 수술을 집도하는 건 명백한 잘못이다. 이것 역시 조이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조이 이전에 수술을 집도 했던 남자 의사 딘에게도 똑같은 잘못이 있거든, 명백하게. 물론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는 가끔 이렇게 먼저 선을 넘어주는 이들 또한 필요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쿵 저러쿵 따져봐도 주인공으로서 하여튼 법을 어긴 건 맞잖아. 그로인해 남편과 딸에게 충격을 준 건 맞잖아. 그럼 이제 영화의 후반부 관건은, 남편과 딸 사이에서 조이가 어떻게 감성을 추스르느냐 일 것이다. 가족이 어떤 과정을 통해 다시 뭉치는지 그리는 게 필요할 거라고. 근데 이 과정에서도, <콜 제인>은 자충수를 남발한다. 

조이의 남편은 성실하고 또 유능하며, 약한 자들을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검사 쯤으로 묘사된다. 가정에도 충실하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에 갑자기 그 남편과 이웃집에 사는 조이의 친구 사이 불륜 요소를 끼워넣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요소가 엄청 과한 것은 또 아니었다. 그냥 짧은 단 한 번의 키스. 그마저도 입술을 떼자마자 서로 실수임을 인정하는.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잘한 짓이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영화는 이 작위적이고 설득력 없는 키스를 통해 조이에게도 면죄부를 발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여성들을 위해서라곤 했지만 하여튼 조이가 불법적인 일을 벌인 건 맞지요? 그로인해 남편과 딸이 상처를 입은 것도 맞지요? 하지만 남편도 알고보니 이웃집 여자와 키스 했네요. 그럼 조이나 그 남편이나 똑같이 사고친 거 맞지요? 그러니까 이쯤 되면 둘이 퉁쳐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뉘앙스. 조이와 딸 사이 관계 봉합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엄마의 진실을 알고선 집밖으로 뛰쳐나가며 싫다 말했던 그 딸이, 단 한 순간만에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오히려 그녀를 응원하는 존재가 된다. 중간에 그 어떤 다른 과정도 없이 말이다. 그냥 영화의 상영시간이 끝을 향해 가고 있으니 부랴부랴 어설프게 봉합한 모양새. 

논쟁적인 소재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정작 그 묘사에 있어서는 어설프게 굴어 오히려 자충수를 만든 영화. 그리고 이해 되면서도 또 동시에 위험하게 느껴지는 극중 인물들의 연대. 대개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과 교훈을 주려 하지만, 때때로 <콜 제인>처럼 한 가지 주장을 하며 목소리를 드높이려는 영화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랬다면, 머리를 더 영리하게 썼어야지. 관객들을 설득하고 또 자기 편으로 돌려 세우려면 조금 더 세심하게 굴었어야지. 주제와 소재는 명확하나 필력은 떨어지는 소설 같은 영화. <콜 제인>이 딱 그 짝이다. 

2023/03/07 16:41

thanos was right 객관성 담보 불가


"타노스가 옳았다"


아니, 씨바- 시간 여행하고 동료까지 희생시켜 가며 대전투에서 가까스로 승리해 전우주의 절반을 다시 살려냈건만 한다는 소리가 이따구냐?

이거 누가 썼어?




너냐? 피 좀 볼래?




아님 너야? 기도라 맛 좀 볼래?




'타노스 님이 둘을 좋아합니다'

2023/03/07 16:33

우리 집에 유령이 산다 극장전 (신작)


영화는 그냥 <E.T.> 플롯이다. 문제 많은 가족 안에서도 괴리된 듯 살고 있는 한 소년이, 비일상적인 존재를 만나 친구가 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비일상적인 존재의 미스테리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다른 이웃 친구와 손잡고 모험을 떠난다는 이야기. 당연히 그들을 쫓는 악당은 비열한 정부기관이고... 어쨌든, <우리 집에 유령이 산다>는 <E.T.>의 외계인을 그냥 유령으로 바꿔놓은 작품에 불과하다. 그게 진짜로 전부다. 그런데 따라한 것치고는 <E.T.>의 절반에 절반도 못함. 

만약 이 영화에도 레시피가 있다면, 거기엔 아마 이렇게 쓰여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모험과 액션, 호러 요소가 가미된 멋진 가족 + 성장 드라마를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하나씩 따져보자. 영화의 모험은 정말이지 형편없다. 이 영화는 그저 문제많은 한 소년과 다른 한 소녀가 문제많은 또다른 환상적 존재와 손을 잡고 로드 무비를 찍으면 저절로 모험 영화가 된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모험 영화 좀 좋아한다 하는 관객들에게, 이 정도의 모험을 과연 모험이라 부를 수 있을까? 위기가 충만하고 그 안에서 스릴이 튀어나오는 롤러코스터 같은 모험? 이 영화는 그냥 우버 타고 떠나는 바이브다. 당연히 액션도 전무. 그럼 호러? 유령 나온다고 무조건 영화가 무서워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유령 어니스트가 목도 비틀고 자기 자신의 얼굴도 녹여내는 진기명기 다 보여주는데 톤 자체가 무섭지 않아 그냥 지루해 울고 싶어졌다.

그럼 남은 건 이제 가족 영화와 성장 영화로써의 면모인데, 이것도 영화는 크게 오해한 듯 하다. 그냥 문제 많은 가족이 등장해 조금 투닥거리다가, 목숨이 걸린 결정적 순간엔 그 밉던 부모가 자식들을 구해내려 함으로써 알고보니 우리 모두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정도로 진행하면 가족 영화 되는 거겠지?-라고 생각한 듯. 성장 영화로써도 마찬가지다. 아, 그냥 친구들이랑 좀 못 어울리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소년 하나 만든 뒤에 유령과 우정 쌓게 만들면 저절로 성장 드라마는 쓰여지는 거겠지? 에라이,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영화면 이제부터는 나도 스필버그다. 

유령 어니스트를 묘사한 CGI와 특수효과도 뭔가 애매하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자잘한 에피소드들 역시 김빠진다. 전반적으로는 그냥 재미없는 영화. 그래도 아마 당신의 자녀가 7세 미만이면 조금 즐길 수 있을지도? 근데 정작 영화 관람 등급은 12세 관람가라는 게 함정. 

2023/03/07 16:19

카운트 극장전 (신작)


1988년 서울 올림픽. 박시헌은 대한민국 복싱 국가대표 선수란 막중한 타이틀을 달고 치열한 승부 끝에 금메달과 은메달 사이 기로에 서게 된다. 상대인 미국 국가대표 선수만 쓰러뜨린다면 금메달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될 터였다. 하지만 경기는 점점 미국 선수의 우세로 기울어가고, 시헌 역시 나름의 고군분투를 벌이지만 쉽지 않음을 느낀다. 그렇게 끝난 경기. 아, 이대로 판정까지 가면 분명 판정패일텐데. 그런데 이게 웬걸, 시헌은 자기 스스로도 갸우뚱하게 되는 판정 결과로 인해 판정승을 거두고 끝내 금메달을 손에 넣게 된다. 그토록 바라던 금메달. 그렇담 이제 시헌과 대한민국 전체는 그 금의 향연에 마냥 기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시헌조차도 의문을 표했던 승부가 아닌가. 상대 선수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들까지 뇌물주고 사온 금메달이라 떠들며 비난하고 또 부끄러워한다. 

복싱을 비롯해 태권도나 가라데 등 대부분의 입식 격투기 종목들은 '카운트'란 개념을 갖는다. 입식 격투기, 말그대로 서서 하는 격투기이니 상대의 일격을 맞고 쓰러진 선수에게 보통 10초 정도의 다시 일어설 시간을 주는 것. 비록 나는 복싱은 커녕 그것을 입식 격투기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지만 그 옛날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벌였던 닭싸움마저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니, 쓰러진 선수가 그 10초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그 시간동안 어떤 생각에 빠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상대에게 한껏 맞은 직후일테니 몸 곳곳이 아프고 쑤시는 것은 물론이요, 정신이 몽롱하고 혼란스러운 것 또한 당연한 사실이겠지. 그럼 그동안, 선수는 정말이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니, 다시 일어설 것인가? 링 밖에 앉아있는 구경꾼들이야 당연히 일어나야지 않겠냐고 일갈 하겠지만 글쎄, 링 안에 쓰러진 상태가 되고도 그런 말을 당연한듯 할 수 있을까?

오해로 점철된 명예, 시헌은 그렇게 10년을 살아왔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그토록 좋아했던 복싱도 포기한 삶. 아내에겐 늘 미안한 남편이요, 아들에겐 늘 부끄러운 아버지로 살아왔던 10년. 그러나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가 그렇고 또 넓게보면 무협 장르 영화도 그렇듯이, 시헌은 특출난 제자를 만나 그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본다. 링 위에서 당당하게 똑바로 서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제자. 그렇게 시헌은 그 제자와 친구들에게 자신의 지난 10년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10년까지 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제자들에게 쓰지 않았더라면 그의 연금 통장 속 돈들은 그와 가족들을 번듯한 아파트 안의 삶으로 인도할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링 안에서는 스승이고 감독이고 코치고 그 누구도 너와 함께 싸워줄 수 없다는 말. 링 위에 올라간 순간, 우리는 누구나 혼자가 된다. 끝까지 두 발로 서서 싸우다 이기면 물론 좋겠지만, 우리 삶에 그런 환상은 잘 어리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히 넘어질 것이다. 회심의 일격이랍시고 내지른 주먹은 상대를 빗맞출 것이고, 열심히 준비했던 스텝은 엉키고 꼬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강대한 상대의 어퍼컷에 필시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게 다 그렇듯,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10초의 시간이 카운트 될 동안,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 다시 숨을 고르고, 다시 이를 악물고, 다시 조금씩 일어서서, 다시 두다리로 나 멀쩡하다는 듯 허세 조금 섞어 버티는 일. 링 위와 인생 위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쓰러진 다음에 있다. 

다시 일어서기 까지, 시헌에게는 10년이 걸렸다. 아무래도 10초 보다는 조금 길게 느껴졌을 그 시간, 10년.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쓰러진 순간보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준비한 그 10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물론 링 위와는 달리, 우리네 인생 위에는 그 카운트를 대신 세어줄 심판의 존재가 부재한다. 하지만 시헌 옆에 든든한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제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지 않은가. 여차해서 쓰러졌다면 주위를 둘러보자. 그리고 다함께 카운트를 세어보자. 다시 숨을 고르고, 다시 이를 악물고, 다시 조금씩 일어서서, 다시 두다리로 나 멀쩡하다는 듯 허세 조금 섞어 버티기 전까지. 

2023/03/06 17:58

더 웨일 극장전 (신작)


고래가 되어버린 남자를 아시오?

그 남자, 그러니까 그 고래는 한 대학교의 작문 관련 수업 교수로서 제자들에게 반복해 말해왔다. 본디 에세이를 비롯한 글쓰기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칠수록 나아지는 것이라고. 문맥을 다듬고, 문장을 깎으며, 단어들을 바꿔쓰면 느릴지라도 조금씩 앞을 향해 진군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후 잔뜩 비대해진 몸을 주체하지 못해 다른 이들 앞에 나설 수 없게 된 그 고래의 사연이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고치고 수정할 여력이 없었다. 아니, 동기를 잃었다고 봐야할지도. 그렇게 앞으로 헤엄쳐 진군할 동기와 용기 모두를 잃은 고래는, 이제 뒤로 떠내려가 후퇴할 이유 하나만을 붙잡는다. 살아갈 용기는 없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을 이유는 생겼다. 부디, 내가 하루라도 어서 빨리 죽어 남겨둔 유산으로 유일하게 남은 내 '작품'에 일조 하겠다는 이유. 고래에게 그 '작품'이란 자신의 딸이었고, 오직 그녀를 위해 그는 자기파괴적인 면모로 마지막 나날들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그 반항적인 딸과 서먹해진 전 아내, 신의 부름이랍시고 만난 젊은 선교사,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친구 사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고래는 끝내 깨닫고 만다. 때로는 가장 솔직한 단어가, 가장 진솔한 문장이, 가장 나다운 문맥을 갖춘 글이 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 낙제 직전인 딸의 과제를 도와주겠답시고 에둘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던 고래는 어느 순간 진실의 광명을 맞이하고, 자신의 삶 후반 내내 되뇌어왔던 명문으로 스스로의 진실된 모습을 꺼내어 딸에게 다가간다. 딸도 자신과 같음을, 딸 역시 자신을 원하고 있었음을 당당하게 부르짖으며 맨다리로 해내는 진군. 영화가 비추지 않은 마지막 쇼트 직후의 남자는 분명 쓰러져 그 쓸쓸했던 생애를 마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직전에라도, 남자가 가장 행복하게 여겼던 순간을 그에게 다시금 복기 시켜준 영화의 마지막 자비에, 정중히 감사 인사를 전하게 된다. 

브렌든 프레이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갓 앤 몬스터>로 젊음 그 자체를 연기 했었고, 이후엔 <조지 오브 정글>이나 <미이라> 시리즈 등을 통해 친근한 할리우드 액션 스타로 발돋움 했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통해 브렌든 프레이저는 거의 은둔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일반적인 관객의 눈으로 봤을 때 찬란 했던 그 시절 그 근육질 스타 이미지에서도 점차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랬던 그가, <더 웨일>을 통해 수면 위로 다시금 펄쩍하고 뛰어오른 건 정말이지 경탄할 만한 일이다. 

이따금씩, 영화와 배우가 서로를 구원할 때가 있다. 마약 중독 등으로 할리우드의 탕아가 되었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이언맨>을 통해 구원받았고, <아이언맨> 역시 그를 통해 완벽한 토니 스타크를 구현해내며 구원받았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음에도 동양인으로서 별다른 중요 배역을 맡을 수 없어 영화계를 잠시 떠나 있었던 키 호이 콴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통해 구원받았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또한 키 호이 콴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으며 구원받았다. 더불어 <더 웨일>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역시, 과거 <더 레슬러>를 통해 미키 루크를 구원하고 또 그로 구원받은 바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어, <더 웨일>은 영화와 배우가 서로를 구원할 때가 존재한다는 그 명제에 대한 가장 최신의 증거가 되어준다. 

영화계에서 한 발짝 멀어진채 관객들 뇌리에서도 잊혀져가던 왕년의 스타 브랜든 프레이저는, <더 웨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연기력을 입증해내며 구원받았다. 하지만 어디 그뿐일까? 구원받은 건 <더 웨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만약 주인공인 찰리의 역할을 다른 배우가 했었다면? 브랜든 프레이저가 실제로 겪어왔던 그 파토스를 겪어보지 못한 누군가가 했었다면, <더 웨일>이 지금만큼의 파괴력을 과연 갖출 수 있었을까? 브랜든 프레이저는 강력한 에토스로 <더 웨일>을 구원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실제 삶을 영화 안으로 끌어옴으로써, 단순 특수 분장 이상의 무언가를 작품에 덧씌운 주연배우의 힘. 그렇게, 영화와 배우는 서로를 구원했다. 이번에도 말이다. 

2023/03/02 13:44

타르 극장전 (신작)


전락에서도 스펙터클을 찾을 수 있다면. <타르>는 그 증거가 되어주고, 그 안에서도 특히나 명연으로 빚어낸 케이트 블란쳇의 표정은 또렷한 실증으로 남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진채 정상에서 군림하던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특이점을 맞고, 그로인해 점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몰락의 서사는 지금까지 흔했다. 하지만 그 짐짓 뻔해보이는 서사에 케이트 블란쳇은 스스로를 온전히 던져냄으로써, 그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야기도 특별한 것처럼 보이게끔 <타르>를 빚어냈다. 감독과 작가를 넘어, 거장이 된 배우를 오롯이 끌어안아보는 경험. <타르>는 그야말로 케이트 블란쳇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하다. 

리디아 타르는 모든 것을 가졌다. 세계적인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그녀를 바쁘게 만들어주었고, 또 원하는 것만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으며, 자신만의 잣대로 남들 또한 평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는 크고 넓어 때때로 그 빈 공간들이 무섭게 느껴질 정도인 집에 산다. 사랑하는 연인,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여기에 그녀에겐 따로 작업할만한 작업실도 존재하고, 또 조용하고 빠른 고급 스포츠카도 있다. 그렇게 그녀는 정말로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다 누리는 듯 보인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시종일관 불안에 떠는 것일까? 왜 잠을 자다가 알 수 없는 소음에 눈을 뜨고, 왜 메트로놈의 정박자에 정신을 놓으며, 도대체 왜 지하실에서 홀로 도망치다 넘어지는 것일까? 그저 그녀가 자신의 업계에서 1인자이기 때문에? 1인자의 신경질적인 고독함, 뭐 그런 건가? 

영화는 그 자리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은 뒤 그저 공백으로만 채웠다. 그러니까, 결국 그 구멍 안 공백에 대한 질문은 순전히 관객들 몫이다. 자살한 과거의 제자가 써두었던 유언처럼,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람들을 멋대로 부리는 사람일까? 정말로 자신이 가진 것을 활용해 상대의 감정을 홀랑 벗겨먹는 사람일까?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협박해서 제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일까? 리디아는 그런 사람인 것일까? 감독과 작가, 심지어는 해당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조차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읊조려 주지 않는다. 정말로? 정말로 리디아는 그런 사람인 걸까? 그렇담 그녀가 겪은 그 모든 파국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을 넘어 업보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물론 계속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가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고 있지 않기에, 어쩌면 리디아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일에 출중 했을 뿐인데, 그런 리디아를 시기한 몇몇 사람들의 거짓말로 인해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일 수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 끝을 향해 갈수록,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리디아를 향한 더 강력한 의심들이 들어차 마구 증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리디아 타르는 <위플래쉬>의 테런스 플레쳐의 훨씬 부드러운 버전으로 관객들 뇌리에 각인된다. 

듣기로, 서구권에 'Tarr'이란 성씨는 존재하지만 'Tar'은 존재하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보기 힘든 성씨라고 했다. 그런데 왜 굳이 영화는 주인공의 LAST NAME 빈 칸에 'Tarr'가 아닌 'Tar'을 썼을까. 'Tar', 그러니까 타르라고 했을 때 보통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점성을 가진 검은색의 액체이다. 그것은 아스팔트에 쓰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못을 이뤄 과거 여러 고대 생물들을 빠뜨려 조금씩 천천히 죽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발암 물질이고. 여기에 <타르>는 애너그램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덧댄다. 'Tar'은 'Art'가 될 수도 있고 'Rat'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리디아 타르는 과연, 순수하게 '예술'에 헌신했던 억울한 피해자였을까? 아니면 '쥐'처럼 여러 타인들을 물어뜯고 옥죄이며 업계를 흐트러뜨린 가해자였을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그 불안은 걱정과 우려의 심리적 발현이다. 리디아 타르는 1인자로서 불안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1인자로서 저질렀던 과거의 만행들 때문에 불안했던 것일 수도 있는, 완전히 반대의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녀가 그토록 불안에 떨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녀를 밤에 잠 못 들게 만들었을까? 예술가인지 쥐새끼인지 모를 그녀에게, 불안이 검은 타르처럼 흘러넘친다. 

2023/03/01 14:29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극장전 (신작)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인생이 털렸다. 

그 말은 반대로, 우리가 평소 얼마나 스마트폰에 인생 전부를 걸고 사는지를 거꾸로 알려 준다. 이야기의 초반부, 영화는 주인공인 나미를 관객들에게 소개해주기 위해 그녀의 일상을 스마트폰 중심의 발랄한 몽타주로 표현한다.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나미는 잠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또다시 일을 하고, 퇴근 뒤에는 친한 사람들과 저녁을 먹곤 노래방에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마무리 되는 하루. 그런데 그 삶의 모든 순간 곳곳에는 스마트폰이 항상 함께한다. 아니, 함께한다는 표현 보다도 이제는 이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나미는 하루를 시작할 때도 스마트폰의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며, 스마트폰 네비게이션 앱과 교통카드 앱으로 출근을 한다. 업무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과 저녁 결제도 모두 스마트폰으로 하지.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놀 때 스마트폰 카메라로 추억을 남기는 건 덤.

스마트폰은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보급된 도구일 것이다. 도구. 우리는 도구를 두고 말할 때 그 도구에 선악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선악을 결정하는 건 언제나 그 도구의 사용자지. 망치가 못을 박는데 무척이나 효과적인 도구지만, 동시에 사람 머리를 가격해 두개골을 부숴버리는데도 효과적인 도구라는 점이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건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지, 스마트폰도 도구니까. 스마트폰은 방구석에 앉아서 지구 반대편의 소식까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무척이나 강력한 도구지만, 망치가 그렇듯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용자의 손에선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고. 

성실한데 실행력까지 좋은 악의 손바닥 위 스마트폰 속에서, 주인공 나미는 그야말로 인생의 파멸을 맞닥뜨린다. 사회적 평판은 무너지고, 가족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거기에 임시완의 서늘한 표정을 곁들임으로써 관객들의 살갗에 소름이 돋도록 만든다. 우리 모두가 들고 사는 도구를 통해 벌어지는 파국. 영화 속 주인공 뿐만 아니라, 나도 걸릴 수 있는 무척이나 허들이 낮은 덫. 스마트폰을 소재로 골라 잡은 스릴러의 공격력은 이토록 강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꽤 그럴 듯한 전반부에 이어, 어디서 많이 본 것만 같은 후반부를 보여줌에 따라 아쉬움을 남긴다. 스마트폰과 SNS를 소재로 하는 스릴러라고? 와, 그럼 다른 건 몰라도 현실성과 시의성 하나는 정확하겠군. 그런데 그런 영화가 어째 후반부는 공장에서 마구 찍어낸 듯한 평범한 이야기 전개로 흘러 가다니? 주인공의 가족이 사는 주택에서 벌어지는 클라이막스 속 살인마와의 대면 장면은 통째로 뻔해 여태껏 영화와 함께 달려왔던 관객들의 맥을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인마에게 총을 겨누는 주인공의 모습. 영화는 여기서 정말로 큰 패착을 드러낸다. 

보통 악당에게 총을 겨눈채로 혼란에 빠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다루는 장면들에서는 크게 두 가지 패턴이 나타난다. 첫번째, 지금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경우 악당은 그 목적을 이뤄낼 것이다. 그 목적은 크겐 세계 정복이 될 수도 있고, 작게는 인질의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큰 피해를 입을 절체절명의 상황. 고로 주인공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상황. 보통 이런 경우는 <다이 하드> 같은 액션 영화들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두번째, 사건은 이미 일어난 이후인데 악당이 의도적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건드리는 상황. 이미 상황은 종결되어 악당이 패배한 직후이지만, 주인공은 분노 또는 슬픔에 사로잡혀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를 고민한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악당을 살리는 대신 그처럼 타락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긴다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주인공의 영혼은 타락 하겠지. 이건 그냥 <세븐> 생각하면 되는 거고. 

그런데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은 정말로 이상한 선택을 한다. 살인마는 이미 형사들에게 잡힌 직후다. 수갑에 꽁꽁 묶였고, 그 스스로도 더 이상 물리적으로 공격을 이어갈 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그럼 일단 방아쇠를 당길 일차적 이유가 없지. 지금 죽이지 않으면 살인마가 또다른 누군가를 죽일 것이다-라는 전제가 전혀 없으니. 헌데 그런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그저 분풀이를 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긴다. 거기엔 어떠한 심리적 전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일반인이건만, 주인공은 권총을 집어들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물론 안다, 방금 그 살인마가 주인공 자신은 물론 그녀의 하나뿐인 가족 역시 거의 죽이는 데에 성공할 뻔 했다는 것을. 그럼 적어도 영화가 주인공의 내면 전쟁을 조금이라도 묘사 했어야 됐던 것 아니겠는가. 심지어 에필로그보면 그 살인마 죽지도 않았던데.

나름 시기적절한 소재를 골라 잡아놓고도 정작 후반부에서는 기시감 짙은 공산품 스릴러가 되는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방아쇠를 너무 쉽게 당기는 주인공을 가진 영화. 그래도 손쉬운 복수의 유혹 앞에서 스스로를 삭히며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것을 막는 주인공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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