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1 23:59

2020년 대문짝 객관성 담보 불가


2020년의 주요 타겟


에피소드 9 / 배드 보이즈 III / 버즈 오브 프레이 / 1917 / 투명인간 / 사냥의 시간 / 뮬란 / 비상선언 / 탈출 / 다악구 /
승리호 / 조용한 곳 2 / 흑과부 / 노 타임 투 다이 / 1984 / 고스트 버스터즈 / 놀란 / 반도 / 베놈 / 퍼스트 에이전트 /
정글 크루즈 / 서복 / 소울 / 리빙 뱀파이어 / 신 vs 왕 /이터널스 / DUNE / 웨스트 사이드 스필버그

2020/04/07 04:03

용서받지 못한 자, 1992 대여점 (구작)


클린트 이스트우드 판 <황야의 7인>. 차이점은 왕년의 무법자께서 친히 나서셨는데 일곱명까지는 필요 없었다는 점. 클린트 이스트우드 한 명이면 그냥 매그니피센트 온리 원.

여러모로 신화를 해체하는 이야기다. 리틀 빌이 잉글리쉬 밥의 영웅담을 한낱 허풍으로 끌어내리듯,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젊은 시절의 자신이 직접 쌓아올렸던 서부극의 신화를 차례차례 부숴 버린다. 나쁜 놈과 못생긴 놈 사이에서 좋은 놈으로 군림하던 천하의 총잡이는 다 늙어빠진 채로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것으로 첫등장하고, 엄청난 속사 실력으로 보안관들을 단번에 쓰러뜨릴 것 같던 장신의 남자는 총을 쏴보기는 커녕 바닥에 구르며 발길질 당한다. 이런 식으로 기존 서부 영화의 전통이나 클리셰들을 비틀어버리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냥 보는 것도 좋지만 기존의 서부 영화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보면 더 의미있게 와닿을 만한 작품. 근데 그 수많은 서부 영화들을 다 클리어하기는 어려우니, 이스트우드가 출연했던 서부 영화들만 봐도 그런 부분들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왕년에 잘 나갔던 무법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정작 그 주인공은 별로 안 나온다는 게 함정. 사실 분량으로만 보면 진 해크만의 리틀 빌이 더 주인공 같음. 그야말로 중반부를 꽉 잡고 있다. 그에 반해 주인공은 중반부까지 빌빌 거리기만 하고. 

총격 장면 자체의 간지는 좀 떨어지는 편이다. 개봉 당시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이미 <장고 - 분노의 추적자>와 <매그니피센트 7>처럼 화려한 총격 장면을 가진 현대적 서부영화들이 날뛰는 시대 아닌가. 그 관점에서 본다면 클라이막스 총격 장면의 파괴력은 그리 크지 않은 편. 오히려 좀 어설퍼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액션으로 돌입하기 직전까지의 긴장감이 좋고, 애초 이 영화가 서부를 배경으로한 본격 액션 영화도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상참작되는 편.

요약해 말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비망록 같은 작품.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가, <라디오 스타>의 박중훈이 그랬던 것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의 이전 무법자 이미지를 모조리 다 끌고 오는 영화다. 예전 이스트우드의 서부 영화들 모두가 이 영화의 프리퀄로 보일 지경.

2020/04/06 19:33

밀리언 달러 베이비, 2004 대여점 (구작)


<미스틱 리버>, <그랜 토리노>에 이어 클린트 이스트우드 연출작들 중 삼대장이라고 할만 한 영화. 그러나 약간 미묘한 게, 좋은 영화인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선 두 작품보다 좀 덜 와닿더라. 그래서 가끔은 <용서받지 못한 자>랑 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도 하는 영화다.

스포츠 영화처럼 굴다가 중반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휴먼 드라마의 길로 빠지게 되고, 또 그러다가도 막판에 가서는 쉽게 답 내릴 수 없는 사회적 난제까지 기어코 언급. 원작이 되는 소설부터가 그러했겠지만, 하여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하고 싶었던 것이 참 많았구나- 싶어지는 구성이다. 근데 그 세가지를 각자 다 겁나게 잘 뽑아냈다는 건 또다른 놀라움. 

모든 감독이 다 그렇겠지만, 이스트우드 역시 감독으로서 모든 필모그래피를 꿰뚫는 몇가지를 여러 차례 굴리는 사람이다. 그는 역지사지의 힘을 믿는 사람이고,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녔던 객기 어린 젊은 시절에 대해 후회하는 사람이며, 무엇보다 피가 아닌 정으로 맺어지는 가족의 애틋함을 그리는 사람이다. 이번 영화에도 역시 복싱에 올인했던 젊은 시절 때문에 가족과 소원해진 주인공이 등장하고, 정작 진짜 혈육이 아님에도 그 이상으로 진하게 묶이는 관계 역시 묘사된다. 그 의미에서 '모크슈라'라는 단어는 힘을 받는 거고.

이 영화가 제시하는 가장 큰 물음은, 가장 마지막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안락사. 또는 존엄사. 인간은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만 하는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난제이긴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매기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이미 최대한의 만족을 맛 보았다는 것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 그냥 단순하게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라기 보다, 이미 이번 생에 큰 만족감을 맛 보았으니 그 이상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끝내는 삶.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스트우드가 무분별하게 안락사 합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 거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내적인 부분에서만 보자면, 이런 안락사가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스포츠 영화로써도 기본적인 재미를 하는 작품이다. 근데 다른 거 다 떠나서 블루 베어 빌리는 그냥 쳐죽이고 싶었다. 존나 시발 본격 스포츠 영화에서도 감히 보기 힘든 최악의 악당이야. 주먹 싸움으로는 턱도 없을 테니, 이스트우드 옹이 더티 해리 빙의해서 그냥 총으로 쏴죽였으면 좋겠다.

뱀발 1 - 내레이션 계의 만능 치트키, 모건 프리먼 등판.
뱀발 2 -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특. 항상 개패고 싶은 인간들이 나옴. 이번 영화에서는 매기의 친모와 그 동생. 매기 비웃을 때 그 두 면상에다가 각각 래프트 라이트 훅을 꽂아넣고 싶었다. 아, 마이클 페냐와 안소니 매키가 연기한 체육관 띨띨이들도. 아, 블루 베어 빌리도 당근 빠따루지. 에라이 시발, 이 영화에 유난히 많이 나오네.

2020/04/06 17:41

그랜 토리노, 2008 대여점 (구작)


이스트우드의 현실적인 자경단 영화. 그리고 무법자로서 마지막으로 총을 뽑은 영화. 

감독 이스트우드에게도 경의를 표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배우 이스트우드에게 결국 설복 당하는 영화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본인이 연기한 배역을 단 한 쇼트로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영민한 배우다. 백발 노인임에도 일말의 구부정함 없이 꼿꼿하게 세운 허리. 사랑했던 아내의 장례식이지만 눈물에 잠기기는 커녕 이를 꽉 문채 철없는 아들들과 손자손녀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동자. 바로 그 몇 쇼트들을 통해, 이 남자가 대체 어떤 남자인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따지고보면 인종차별주의자에다 강건하다 못해 고집불통인 우파이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총부터 뽑아버린다는 점에서 주인공으로서 호감을 얻기에는 영 아니올시다다. 그러나 월트 코왈스키라는 캐릭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특유의 매력으로 결국 관객의 마음에 들어와버린다. 요즘 사람들이 경멸하는 옛날 사람이고, 고집불통에 억센 것도 맞지만 무엇보다 캐릭터 스스로가 본인의 그러한 점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단점들이란 것도 인정해 버린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고 이런 내가 당신의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알지만, 그럼에도 이게 나다. 허나 나는 변화할 것이다. 다만 그 변화의 속도가 느릴 뿐'이라고 캐릭터가 살아 말하는 듯 하다. 이런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기란 어렵지. 특히 마지막 그의 선택까지 보고나면 더욱 더.

<미스틱 리버>에서도 그랬듯, 이스트우드는 실제로 역지사지의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는 상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주인공인 코왈스키는 이웃이된 몽족 사람들의 이국적인 이름을 자기 멋대로 발음하면서, 정작 당사자가 항의하면 '그게 그거지'라는 태도로 일관되게 응수한다. 중반부, 그러던 코왈스키가 병원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응접원의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결국 그가 몽족 사람들의 상황이 되어봤기 때문이리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미스틱 리버>가 가장 어두운 걸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가장 슬픈 걸작이라면. <그랜 토리노>는 그의 가장 따뜻한 걸작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가 연출한 수많은 작품들 중에, <용서받지 못한 자>와 더불어 가장 자전적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다 보게 되면 그 말만이 머릿속에 맴돈다. 'Long live the outlaw.' 우리들의 영원한 무법자여, 그저 만수무강하시길. 

2020/04/05 21:08

미스틱 리버, 2003 대여점 (구작)


과거의 상흔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한 남자. 그리고 그런 그를 온전히 뼛속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한 남자. 여기에 이 모든 걸 그저 바라만 보는 또 한 남자. 피해자와 방관자들의 지독한 이야기.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고작. 아니, 나는 진짜로 최고작이라고 생각해. <밀리언 달러 베이비><그랜 토리노>까지 삼각편대로 생각하면 진정한 역대 최강. 

과거 어린 시절에 늑대 같던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받았던 데이브. 그런 데이브를, 지미는 그저 냅둔다. 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랬던 지미가 데이브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가 그의 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잃어보지 않고는 피해자의 고통을 결코 알 수 없을 거라 말하는 이스트우드의 서늘한 충고. 그런 의미에서, 지미가 데이브의 옆에 앉아 엉엉 울게 되는 장면에서는 찡하다가도 서운하게 된다. 

영화가 미스테리를 던지는 방식이 흥미롭다. 많이 설명적이지 않으면서 무심한듯 시크하게, 말그대로 그냥 던지는 느낌. 데이브가 지미의 딸과 함께 있었던 술집에서의 몇 쇼트는 그자체로 그냥 미스테리가 된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캐릭터를 진상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묶어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왜냐면, 그 뒤 미스테리는 모두 관객들이 알아서 만들어주거든. 내적으로 불안한 사람이 불온해보이는 사건과 간접적으로 엮여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심스럽잖나. 게다가 그 사람이 피투성이로 집에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관객 입장에서 이걸 어떻게 의심 안 할 수가 있겠어.

이후 미스테리를 밝혀나가는 것이 수사극으로써 기본적인 재미를 준다. 그러나 영화는 진범과 그의 동기마저도 무심한듯 시크하게 던지기만 할 뿐. 결국 영화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진범보다 데이브, 지미, 숀 세 남자의 이야기일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후반부의 교차편집은 졸라어썸. 예전에 이미 한 번 본적 있는 영화라 결말을 다 알고 있는데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벌떡 일어서게 되더라. 어릴 시절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지독할 뿐인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존나 연출 잘한 영화였어.

팀 로빈스는 분명 장신의 배우지만, 그가 연기한 데이브는 한없이 작게만 보인다. 타인과 쉽게 공유할 수 없는 과거의 상흔을 가진 사람은 그토록 작기만 한 것이다. 반면 숀 펜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특유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끓으며 연기하고, 케빈 베이컨은 냉정하면서도 문득문득 친절한 눈빛을 잊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뒤를 봐주다니, 영화 외적으로 진짜 좋은 배우진이다. 

지미가 데이브를 묻은 미스틱 강처럼, 방관자들의 삶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만 간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마지막 장면의 지미 일가는 진짜 죄다 패버리고 싶다. 사법처리는 못할지언정, 그 자신 스스로의 마음만은 지옥 불구덩이에 던져졌어야지. <밀양>의 그 새끼 떠오르네. 죄를 지어놓고 스스로 구원받아버린 그 새끼. 딸을 잃었다는 데에서는 안쓰럽지만, 그럼에도 지미는 그 새끼랑 별반 다를 거 없는 놈인 것이다. 

뱀발 - 죽음을 목전에 둔 데이브의 마지막 대사는 '살려줘'가 아닌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였다.

2020/04/04 21:14

라이트하우스, 2019 대여점 (구작)


나름 자가격리는 했는데 정작 그 안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실패해 다 좆망하는 내용의 영화.

윌렘 데포와 로버트 패틴슨의 괴물 같은 연기, 그리고 요상망측한 영화적 분위기로 작년 영화계에서 이목을 좀 끌었던 작품. 그러나 막상 본 영화는, 생각보다 그저 그랬다. 정방형의 1:1 화면비와 흑백 색보정, 그리고 정적이면서도 음울하고 또 불안한 촬영. 하여튼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성취는 어느정도 인정한다. 좁아터진 바위섬 위의 불온한 풍경을 분명 효과적으로 잡아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정작 무서운 장면 1도 없는 이 영화가 그토록 등골 서늘하게 느껴지는 거지.

허나 그 외의 부분들에서는 좀 공감을 못하겠다. 일단 종잡을 수가 없다. 이것은 러브크래프트가 구축한 크툴루 신화의 한자락을 인용해먹는 영화인가? 아니면 그냥 격리된 공간에서의 인간 군상과 그 정신 상태에 집중하는 영화인가? 그도 아니면, 살인을 저지른 등대지기와 그 밑에서 의심의 싹을 천천히 키워내는 남자의 대결을 보여주려는 영화인가? 그것도 아니면, 과거의 상흔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 남자의 신분 세탁 영화인가? 솔직히 쥐뿔도 모르겠다. 미신에 민감한 바닷사람들의 관념을 끌어다가 으스스한 분위기의 오컬트로 재탄생 시키려는 시도는 분명 의미있다. 그러나 설정과 의도만 좋으면 뭐한가. 정확히 이게 뭐에 대한 이야기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고. 

종교적 레퍼런스와 문학적 레퍼런스가 곳곳에 베여있다. 하나님과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고, 트리톤 등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요소들도 존재함. 문학적 요소로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 영화내외적으로 떠다니고, 인어 신화나 상술했던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등도 연상된다. 근데 그것들이 그냥 널브려져 있으면 자연히 좋은 영화가 되는 거냐고. 내가 봤을 때는 아니올시다야. 그 모든 것들이 의미있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야지. 존나 불안하게만 만들어놓고 영화가 수습을 별로 할 생각이 없어뵌다.

다시 말하지만 분위기는 끝장난다. 그렇지만 그걸 제대로 활용했느냐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작품. 그냥 존나 멋진 윌렘 데포 얼굴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을 뿐.

2020/04/04 21:03

캐스트 어웨이, 2000 대여점 (구작)


자가격리를 비롯한 사회적 거리두기 끝판왕. 톰 아저씨의 짠내나는 무인도 표류기.

주인공인 톰 행크스의 척 놀랜드가, 원래는 시간 관념이 철저하다못해 과격할 정도로 과해서 몸을 뒤흔들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페덱스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아래 사람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길길이 날뛰며 설파하는 놀랜드.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를 직시하고 있으니 그에 맞춰 빨리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바로 그랬던 그가 무인도에 떨어지고 나서는 영겁 같은 시간들을 혼자서 감내하게 된다. 택배가 맴피스에서 모스크바까지 오는 데에 87시간이나 걸렸으니 이는 굴욕적인 성과다-라고 말했던 이가 정작 무인도의 첫째날과 둘째날에 한 것은 멍 때린 것 밖에 없었다는 아이러니.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인공도 그랬었다. 언제나 시간 강박 안에서 살던 남자가, 그를 사랑해준 여자에게 시계를 선물 받으며 시작되던 이야기. <캐스트 어웨이>의 척 놀랜드도 시간 강박에 살다 약혼녀에게 시계를 선물 받고는 무인도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그를 이 이야기의 선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표류기는 짠내나게 재미있다. 별 것 아닌데 재밌는 설정들이 흥을 돋구고 이야기에 푹 빠지게 한다. 페덱스 인장이 찍혀있는 택배 박스들 언박싱하는 장면은 진짜 재밌는 설정이다. 하나 하나 깔 때마다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풀어보듯이 기대하게 되고, 별 것 아니었을지언정 나중에 그것들을 놀랜드가 기묘하게 써먹고 있는 걸 목도하게 되며 또 이상한 재미가 나옴. 하여튼 이것 외에도 스케이트 칼날로 치아 박살내는 장면이나 불 피우는 장면 같은 것들, 진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영화 다시 본 게 거의 20여년 만인 것 같은데 진짜 몇몇 장면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더라고. 

마음 같아서는 런닝타임을 한 30여분 정도 더 늘려서 무인도 장면으로 꽉꽉 채웠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 버전도 충분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시간의 생략이 좀 과감한 편이라, 런닝타임을 좀 더 늘려 무인도에 존재하던 상위 포식자랑 싸워 줘터지는 장면 같은 거 좀 더 있으면 어땠을까 싶음. 물론 다시 한 번 말해 지금 버전도 충분히 재미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무인도 표류기' 이상을 갖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영화가, 무인도 표류기에 대해서는 정작 별 관심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이야기의 진짜 중요한 부분은 무인도에 떨어지기 전과 그 섬을 탈출한 이후. 엄청난 일을 겪은 한 명의 인간은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에 대해서 영화가 너무 잘 보여준다. 비단 그 인간의 심성이나 취향 뿐만이 아니라, 그 인간이 맺고 있던 사회적 관계들도 말이다. 일반적인 무인도 표류 영화였다면 주인공이 비행기에서 내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서 끝났겠지. 하지만 영화는 기어코 척과 그 약혼자였던 켈리의 이야기를 더 보여주고야 만다. 분명 중반부까지만 하더라도 무인도에서 개고생하며 불피우고 있는 주인공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금방 불 피울 수 있었을까?' 싶었던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면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로 변모하게 된다. 근데 또 척이나 켈리 입장이 모두 다 이해가 돼. 심지어는 켈리의 현 남편 입장도 이해가 되더라니까. 하여튼 정말 잘 쓴 이야기다.

톰 행크스는 정말로 기분좋게 젊은 상태였고, 원맨 쇼에 가까운 이 영화에서 제 몫을 다 해냈다. 그리고 로버트 저메키스. 당신이 3D 기술 이딴 것에 더 몰두하지만 않았더라면 정말로 좋은 필모그래피를 계속 쌓아갈 수 있었을텐데. 어릴 때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어쩌면, 영화의 신인 것이 아닐까-하는. <빽 투 더 퓨처> 시리즈부터 <포레스트 검프>와 <콘택트>를 거쳐 이 영화까지. 당시의 저메키스는 정말로 오락영화 접신의 경지에 있었다.

2020/04/01 21:42

킬러 인 하이스쿨, 2015 대여점 (구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쌈마이한 포스터 뭐냐곸ㅋㅋㅋㅋㅋㅋ 

처음에는 헤일리 스테인필드 나온다길래 관심 가졌었는데, 크레딧 자세히 보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사무엘 L 잭슨 옹이 나오시더라고. 그래서 보게된 영화. 근데 헤일리 스테인필드 나온다니까 본격 액션 영화일 거라고 기대한 건 물론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낚일 줄은 몰랐다. 그냥 저냥한 액션 코미디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지. 허나 막상 본 영화는 액션의 '액'은 커녕, 그냥 평범한 하이틴 무비였던 것이다. 후반부 주인공 여고생 둘이 홈커밍 파티 준비하면서 의상 입어보고 벗고 하는 몽타주 장면 나올 때 생각했음. '낚여도 너무 크게 낚였구나...'

설정부터 정신이 나갔다. 어린 여자애들을 데려다가 킬러로 훈련시키는 비밀 조직의 등장. 이런 설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 애들은 진짜 여섯살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인다고! 이 순간부터 느꼈어야 했던 거다. 이거 아무리 세게 굴려도 진짜 액션은 안 되겠구나-하고.

평범한 삶을 갈구하던 어린 킬러가, 모종의 계기로 신분을 위장해 고등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 딱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액션 영화로써도 형편없는 편이지만, 하이틴 무비로써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 그래도 초반엔 나름의 기대를 조금 했었다. 주인공이 다른 하이틴 무비 여러편 본 뒤에 고등학교 가거든. 그래서 치어리더 단원 친구들이 말 걸 때도 '너네 이렇게 친절하게 다가오다가 나중에 나 엿 먹일 거지? 하이틴 무비에서는 다 그러던데.'하고 그냥 치워버린다. 때문에 그런 기대도 조금 했었다. 일반적인 하이틴 무비들의 클리셰를 죄다 갖다가 파쇄 해버리는 영화는 아닌가- 하고. 그거라도 했더라면 그건 그거대로 또 재밌었을텐데.

영화 만듦새가 조악하다. 아무리 하이틴 무비 베이스라지만 그래도 사건과 갈등의 심각성은 제대로 묘사해야하는 것 아닌가? 고문 장면은 애들 장난처럼 느껴지고, 무엇보다 제시카 알바가 연기한 악당 세력들 역시 형편없다. 이런 애들이 대체 왜 위험하다는 거야. 

사무엘 L 잭슨은 그냥 귀엽게 나온다. 헤일리 스테인필드는 분명 매력있지만,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는 가장 처지는 작품일 것. 제시카 알바는 연기 외적으로 캐릭터부터가 너무 허접해서 더 할 말이 없음.

한국 한정 포스터가 왜 저런지 모르겠다. 누가 보면 스티븐 시갈 나오는 영화들이랑 같은 부류의 영화들인 줄 알겠네. 진짜 적절히 쌈마이 묻힌 포스터인데. 

뱀발 - 소피 터너 나오는 줄은 몰랐었는데 보면서 깜짝 놀랐다. 근데 마지막에 쿠키 영상도 있네? 얘네 이거 진짜 속편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2020/04/01 17:22

데쓰 프루프, 2007 대여점 (구작)


타란티노가 익스플로테이션 영화에 바치는 애가. 원래는 절친인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까지 한데 묶어 <그라인드 하우스>라는 타이틀로 붙어있는 작품이다. 근데 나는 <플래닛 테러>보다 <데쓰 프루프>가 훨씬 더 좋거든. 둘 다 블루레이로 갖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냥 <데쓰 프루프>만 다시 보기로 한다.

과거 싸구려 영화들의 흥취를 일부러 다시 만들어내려는 작품이다보니, 영화 곳곳에 그 흔적이 긁히고 묻어 있다. 뻔뻔하게 'MISSING REEL' 띄우고 중간 전개를 생략해 전반부 내내 말하던 '랩 댄스'를 맥거핀으로 만들어버리거나, 일부러 조잡하게 편집해낸 사운드 효과 등이 이상하게 잔재미를 준다. 따지고보면 별 것 없는데 익스플로테이션 영화 코스프레를 요상하게 해대니 그게 그냥 재밌게 느껴지는 경우. 존나 뭔 비디오 게임도 아니고 희대의 롤플레잉 무비네. 그 옛날의 구리구리한 영화 컨셉 잡고 막 만든 영화이니 롤플레잉 무비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이 많이 떠오르는 구성이다. 초반부만 보면, '아, 이 여자들이 주인공이구나. 꽤 중요한 인물들이겠는 걸?' 싶어지지. 근데 타란티노는 금세 다 '치아라' 해버린다. 중요한 인물들처럼 소개해놓고 중반부에 그냥 다 리타이어 시켜버리는 패기. 타란티노의 영화적 관습을 모조리 다 깽판쳐놓는 실력은 하여간 알아줘야한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걸 이야기 했었다. '우연'이라는 게 얼마나 '악마' 같은 개념인지. 악마들은 왜 우연에 기댄 내기를 선호하는지. 그 관점에서 본다면 대부분의 공포 영화들도 다 마찬가지지. 묻지마 폭행, 묻지마 살인 같은 거 아니겠냐고. 주인공들이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왜 하필 저 살인마를 만났을까. 주인공들이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왜 하필 귀신 들린 집에 들어간 걸까. 주인공들이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왜 하필 저 히치하이커를 태웠을까- 등등. <데쓰 프루프>의 중반부도 그래보인다. 솔직히 커트 러셀이 연기한 스턴트맨 마이크, 그렇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잖아. 얼굴의 상처가 꽤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긴 해도, 그 자체로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잖아. 근데 시발 그 인간이 미친 살인귀였다는 진실. 존나 재수없게도 하필 그 인간의 차에 올라탔다는 괴로운 진실. 물론 이건 타란티노 영화이니 그 자체를 꽤 리드미컬하고 재밌게 보여주고는 있다. 그래도 어쨌거나 재수 존나게 없어 보이는 건 사실이잖아.

근데 개 웃긴 게, 스턴트맨 마이크 역시 결국엔 재수가 옴 붙었다는 거다. 악마도 피해자가 될 상대를 잘못 선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반부의 그 여자들이 재수가 없어 그와 엮였던 것처럼, 후반부의 스턴트맨 마이크는 재수가 없어 그녀들과 엮이게 된다. 시발 하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게 물불 가리지 않는 여전사 3인방이었을 줄 그가 어떻게 알았겠나. 돈 털려고 들어갔다가 거기서 밥 먹고 있던 강호동과 최홍만을 만난 강도가 된 격이다. 

별 것 아닌 걸로 장황하게 떠들다가, 결국 막판에는 마구 밀고들어오는 쾌감과 흥분으로 마감해버리는 영화. 마지막에 'The end' 뜨는데 거기서 환호성을 지르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커트 러셀 줘터지는 거 개웃김. 이 아저씨는 존나 멋있는데 존나 병신 같아. 그래서 좋아해. 

2020/04/01 14:15

로건 럭키, 2018 대여점 (구작)


<오션스 일레븐>은 핸섬하고 젠틀한 하이스트 무비였다. 도둑들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경거망동 하지 않았다. 여기에 캐스팅도 노골적이었잖아.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게다가 거기는 도둑질 당하는 사람도 앤디 가르시아였으니 더 할 말이 없겠다. 반면 <로건 럭키>는 <오션스 일레븐>의 적절한 변주이면서도 명확한 안티테제로써 존재한다. 멋지고 우아하기는 커녕 실수투성이에 텁텁한 행실만을 보여주는 주인공들. 그들은 태생부터 운도 지지리 없는 형제들이었으며 형은 다리를 절뚝이고, 동생은 한 쪽 손을 잃었다. 그들은 건축 노동자였고, 바텐더였다. 채닝 테이텀과 아담 드라이버는 분명 멋진 배우들이지만, 그럼에도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피트 과의 느낌은 아니지않나. 하여튼 <로건 럭키>는 그런 영화다. 블루 칼라 하이스트 무비로써 <오션스 일레븐>과 대척점에 있는. 근데 감독이 <오션스 일레븐> 연출했던 인간이라 더 웃김.


스포일러 럭키!


근데 좀 웃기는 말이지만, 하이스트 무비에서 우리가 으레 기대하는 것들을 명확히 보여주지는 않는 영화다. 범죄 계획의 전체적인 얼개나 세부적인 묘사 모두 흥미롭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보는 데에는 즐겁지만, <오션스 일레븐>과 그 이후 시리즈들이 보여주었던 기상천외함은 좀 덜한 느낌. 계획의 성공 여부를 전달하는 반전 타이밍도 훤히 예상되고, 무엇보다 그 반전의 트릭 자체가 별로 와닿지가 않는다. 물론 쓰레기봉투에 돈 담아 버리는 것 자체는 분명 효과적인 트릭이었으나 그게 영화적으로 재미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는 말.

그래서 하이스트 장르물로써 보기에는 좀 감흥이 떨어지는 점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영화가 좋았던 건 뭐냐면...... 그냥 주인공의 동기가 참 좋더라. 이혼하느라 딸의 주 양육권도 빼앗긴 주인공. 그 주인공이 딸을 대하는 장면마다 묘하게 짠해지는 부분이 있다. 주인공인 지미가 그 대단한 범죄 계획을 마무리하고 찾은 것은 한 잔의 맥주도 아니고 스트립 클럽도 아니었다. 그가 일평생 최초로 무언가 대단한 일을 성공 해낸 뒤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딸아이의 장기자랑 대회였다. 가장 앞자리에 앉은 것도 아니고, 그냥 객석의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딸아이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원래 리한나의 노래를 부르기로 했던 딸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발견한 뒤, 아버지가 평소 가장 좋아하던 노래로 자랑할 장기를 바꾼다. 대단히 잘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눈을 맞춰가며 그 노래를 부르는 딸의 모습으로 이 범죄 계획이 마무리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면서도 괜히 기분 좋기도 했다.

채닝 테이텀과 아담 드라이버는 나쁘지 않다. 영화의 중심을 나름대로 잘 잡아준다. 그럼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다니엘 크레이그일 것이다. 언제나 멋진 수트 차림으로 애스턴 마틴을 몰며 세상을 구하던 자가, 이렇게 허당 양아치 같은 모습으로 자빠져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괜시리 키득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이스트 영화로써의 매력을 컵케이크에 비유한다면, 그 컵케이크 자체가 대단히 맛있는 건 아니었다. 근데, 그 끝에 올려진 빨간 체리의 달달한 풍미가 꽤 괜찮더라. 어느 지점에 기대를 두고 보느냐에 따라 그 감상이 달라질 것 같은 영화. 그나저나 스티브 소더버그가 참 대단하기는 하네. 성실하기로 충무로에 이준익이 있다면, 할리우드에는 스티브 소더버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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