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1 23:59

2022년 대문짝 객관성 담보 불가


2022년의 주요 타겟

웨스트 사이드 스필버그 / 모비우스 / 포와로2 / 블랑2 / 언차티드 / 광기의 멀티버스 / 배트맨 / 드림 /

라이트이어 / 마걸사2 / MI7 / 바빌론 / 불릿트레인 / 블랙 아담 / 와칸다 / 서울대작전 / 슈퍼 마리오 /

뉴 유니버스 2 / 아바타2 / 아쿠아맨2 / 플래시 포인트 / 도미니언 / 사랑과 천둥 / 비스트 워즈 / 존윅4 /

박찬욱 / 외계인 / 히로카즈 / 콘크리트 유토피아 / 스트리밍 / 비상선언 / 야차 / 피랍 / 원더랜드

바이러스 / 승부 / 킹메이커 / 교섭 / 범죄도시2 / 죽여주는 이원석


2022/01/24 16:13

레지던트 이블 - 라쿤 시티 극장전 (신작)


어차피 이 영화도 돈 내고 본 관객인 내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으니, 나도 그냥 곧바로 결론부터 질러봐야겠다. <레지던트 이블 - 라쿤 시티>는 생활감 가득한 중고 물품 같은 영화다. 원작이 되는 게임 시리즈와 또 그걸 리메이크 했던 실사 영화 시리즈,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좀비 장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여러 다른 영화들까지도 쉴새 없이 베껴 온 영화. 근데 베껴와서 잘 만들기나 했으면 또 모르겠어. 

장르 영화 내에서 비슷한 형식 또는 전개 또는 묘사가 자꾸 반복되는 것. 그것은 클리셰가 될 수도 있지만 달리 말하면 또 컨벤션 역시 될 수 있는 것이다. 진부할지언정 오히려 그게 전통이 될 수도 있단 말이다. 이미 골백번도 넘게 반복되어온 장면이지만, 그럼에도 서부영화에서 시끌벅적한 마을 주점 안으로 외부인 주인공이 들어서는 순간 고요해지는 그런 묘사 같은 게 없으면 또 괜히 아쉽고 심심하잖나. 좀비 장르 역시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진부한 것들을 가지고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단 소리다. 

하지만 뻔한 것과 게으른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기존 장르에서 벗겨 온 장면들만 있으면 그건 문제라고.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새롭고, 조금이라도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보려 최소한의 노력은 했어야지. <레지던트 이블 - 라쿤 시티>는 그 점에서 빵점이다. 주인공 남매의 과거 설정은 원작 게임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뜬금없고, 엄브렐라 사의 음모를 설명하는 방식 역시 형편없다. 난데없이 웬 사회 운동가 겸 과학자 같은 단역 하나 출연시켜서 음모론 주르륵 읊게 한 다음에 바로 퇴장 시킴. 영화의 태도가 하나부터 열까지 그냥 다 문제다. 

원작 게임 시리즈를 제대로 즐겨보지 않았다해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던 이름들이 총출동한다. 클레어 남매와 질 발렌타인, 레온, 웨스커 등등. 원작 게임으로치면 이거 거의 '어벤져스 어셈블' 같은 장면인 거 아냐? 근데 왜 그 캐릭터들을 다 이렇게 멍청하게만 쓰는 건데? 각 캐릭터들은 뜬금없이 행동하다가 뜬금없는 결과를 낳는다. 각자에게 부여된 서사가 다 해결되는 것조차 아냐. 레온은 신참 경찰인데 경찰 고위급 간부 아버지에게 일종의 콤플렉스를 느낀다. 허나 그것은 그저 부여된 사연일 뿐, 딱히 이 영화 내에서 해결되는 건 없음. 그리고 그건 클레어 남매 역시 마찬가지고. 아니, 그나마 사연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 셋은 다행이지. 질 발렌타인은 캐릭터랄 게 아예 없고, 이후 전체 시리즈의 핵심 악역으로 발전할 웨스커는 재미가 없음. 덩달아 카리스마도 없는데, 이후 메인 악역으로 대체 어떻게 써먹겠단 전략일까. 아, 그전에 일단 이거 속편 나올 수나 있냐? 

공포 영화로써 무섭지도 않고, 좀비 때려잡는 액션 영화로써 화끈 하지도 않다. 밀라 요보비치의 기존 시리즈 역시 훌륭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새롭게 리부트 되는 영화면 어느 한 부분이라도 업그레이드 되어 리마스터링 느낌 내는 게 맞는 거 아니냐? 지금 느낌은 리마스터링이라 하기에도 부끄러울 최적화도 안 된 다운그레이드처럼만 보인다. 

2022/01/24 15:52

왓 이프...? SE01 연속극 대잔치


MCU의 첫 애니메이션 시리즈. 분명 흥미로운 기획이지만 품고 있던 그 가능성을 모조리 구현해냈냐고 묻는다면 글쎄...

애니메이션이란 포맷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실사 영화 시리즈들에 비해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더불어 때로는 설명까지 부족하게 느껴져 약간 날림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어지는 면면도 있고. 그럼에도 확실히 좀비화 에피소드나, 시즌 피날레까지 이어지는 인피니티 울트론 에피소드 등은 재미지다. 원작에서의 그 권위와 아우라에 비해 실사 영화 시리즈에서는 다소 푸대접 받은 듯한 느낌이 강한 울트론 같은 경우엔 확실히 캐릭터 자체가 재밌어졌다. 

다만 나머지 경우에는 그닥 재밌는지 모르겠음. 파티광이 된 토르 같은 경우에는 뒤늦게 발현된 그의 개그 감각 덕분에 기획된 케이스인 것 같은데, 이게 거의 40여분에 달하는 에피소드 하나로 만들어질만큼 재밌는 설정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름. 그리고 그건 스타로드가 된 티찰라 에피소드 역시 마찬가지. 닥터 스트레인지 관련 에피소드는 그나마 후속 시리즈와 관계가 생길 것 같아 이해가 가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블랙팬서>에서의 인기 덕분이었는지 킬몽거가 엄청나게 상향 조정됐다. 이 새끼 이 정도로 똑똑한 새끼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인기 덕에 묘사가 더 불어버린 느낌. 반면 똑같은 인기 캐릭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의 여러 멀티버스들 속 토니 스타크들은 하나같이 다 개같다. 존나 허무하게 죽어버리거나, 존나 양아치처럼 나대거나, 존나 멍청하거나, 존나 약하거나, 존나 막가파임. 갑자기, 우리 세계의 토니 스타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를 이 덕분에 알게 되었다. 빌런 제조기라고 놀렸었는데, 다시 보니 우리 세계 토니 스타크가 선녀였어. 


뱀발 - 캐스팅 목록만 놓고 보면 희대의 스타 캐스팅 시리즈임. 

2022/01/24 15:42

만달로리안 SE02 연속극 대잔치


잘 나왔던 시즌 1에 결코 부끄럽지 않을 시즌 2. 오리지널이라 할 수 있을 클래식 3부작을 뒤로한채 새롭게 닦인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던 시리즈가, 시즌 2에 이르러서는 그 클래식 3부작과 프리퀄 3부작에 이어 심지어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속 설정들까지 끌어안으며 더 큰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이 정도라면 이 오래된 프랜차이즈의 새로운 베이스 캠프를 이쪽에 옮겨 설치한다 해도 결코 싫지 않다. 

외로운 총잡이를 주인공으로한 웨스턴 장르, 그리고 아들을 등에 업은 무사를 주인공으로한 찬바라 장르와의 교감은 여전히 지속된다. 시즌 2의 첫 에피소드에서 외딴 사막 마을로 딘 자린이 천천히 들어서는 장면은 누가 뭐라해도 웨스턴의 그것. 여기에 웨스턴 장르로 치자면 인디언 부족의 역할을 하는 터스켄 약탈자들과의 임시 동맹과, 큰 괴물 보스를 잡기 위해 뛰는 레이드 묘사. 그리고 이후 후속 에피소드에서 줄줄이 전개되는 같은 일족의 사람들과 그들의 계율, 폭주하는 쇼군을 막기 위해 다른 무사와 손을 잡는 주인공 등등. <스타워즈>를 넘어 웬만한 팬보이들이라면 사족을 못 쓸 이야기들로 한 시즌이 꽉 짜여있다. 중간중간 조금 늘어지는 부분들도 있지만, 전체 시즌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재미없기가 힘들다. 

새로운 캐릭터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거니는 것. 제작진은 그만으론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결국 아소카와 보바 펫, 여기에 심지어 루크 스카이워커까지 불러내 오리지널 시리즈와의 결속을 더 다져낸다. 솔직히 루크가 등장했다는 건 거의 1년 전부터 알고 있던 스포일러인데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바라오던 '그' 루크의 귀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라스트 제다이>가 정사에서 퇴출된 것은 아니니, 멀티버스가 열린 게 아닌 한 결국 이 루크도 우리에게 충격을 선사 했던 달라 사이렌 젖 빠는 루크가 되겠지만... 그래도 반가운 건 반가운 거다. 이제와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랬던 것처럼 전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라스트 제다이>의 존재 자체를 기억 조작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차라리 이 시기 속 이 루크의 모습에만 좀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 그로구랑 쎄쎄쎄 하면서 도 닦는 시리즈 또 따로 하나 나와도 괜찮은 거 아니냐?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보바 펫이 본격적으로 첫 소개되는 에피소드의 연출을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했더라. 어쩐지, 그 에피소드만 혼자 개성이 다름. 분명 릴리즈 된 플랫폼은 디즈니 플러스인데, 묘사와 수위는 피만 안 튀었다 뿐이지 예사롭지 않은 B급 VHS 감성. 보바 펫 혼자 스톰 트루퍼 한 개 중대 뚝배기 깨며 털어먹는 거 개웃김. 멋있고 재밌긴 한데 개웃김. 그동안의 <스타워즈>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그림이라. 생소 하면서 개웃김. 

RPG 게임으로 치면 주인공은 이미 시즌 1 초반부터 만렙 갑옷 맞추고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근접 공격 무기가 아쉬웠던 것인지, 이번 시즌 2 들어서는 무기 슬롯이 잡다해졌다. 순도 100%의 베스카 창부터 끝끝내 얻게 되는 다크 세이버까지. 이 기세라면 나중엔 베스카로 만든 도끼부터 표창까지 나올 것 같다. 어째 점점 도라에몽 되어가는 것 같은데. 

다른 말 더 할 것 없이, 그냥 존나 재밌었다. 그로구와의 결별이 아쉽긴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이제부터는 좀 더 훨훨 날아다니며 더 잘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 이 시리즈의 새로운 희망은 타투인과 얼데란이 아니라 존 파브로가 품고 있었던 게로구나!

2022/01/20 18:20

만달로리안 SE01 연속극 대잔치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서 군계이학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일 것이다. 둘 다 영화와 TV 시리즈, 만화 등의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그 세계의 변두리가 넓어지고 있고 또한 역사 역시 오래되어서 그 두 팬 집단 사이의 경쟁 아닌 경쟁 역시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나야 <스타워즈>에 대한 일편단심 충절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스타트렉> 역시 미덕을 갖고 있는 세계관이다. 특히 JJ 에이브람스가 전권을 잡은 리부트 영화 시리즈 이후로, <스타트렉>은 마치 애플의 IT 제품들을 떠올리게끔 하는 깔끔하고 유려한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특유의 세련된 감각을 선보였다. USS 엔터프라이즈호 디자인 같은 거 봐라, 무슨 방금 뜯은 박스에서 꺼낸 프라모델 신품 같지 않나. 물론 전개에 따라 반 파손 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스타워즈> 파생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뭔 놈의 <스타트렉> 이야기를 이리 길게도 하나-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만달로리안>을 이야기 함에 있어, 그 세련 됐다는 <스타트렉>과 정반대 지점에 놓인 <스타워즈> 세계관의 느낌을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세련된 깔끔함. <스타트렉> 세계관의 그 질감에, <스타워즈>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응수한다. 팬으로서 하는 칭찬의 표현으로, <스타워즈>는 생활 기스 잔뜩난 중고 물품 같은 세계관을 펼쳐낸다. 우주선과 드로이드를 비롯한 기계 장치들은 심심하면 고장이 나 스파크를 튀기고, 사막 행성의 거주민들 옷섶과 소매에선 모래가 흘러내린다. 시퍼런 우유를 들이키며 뒷통수에 꼬리 같은 촉수가 두 개씩이나 달린 여성 외계인의 춤사위를 관음증적으로 묘사해내는 세계. 시칠리아 섬의 마피아들 마냥 깡패 집단이 한 도시의 뒷배로 군림하는 세계. <스타워즈>의 매력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을 <만달로리안>이 찍었다.

외롭고 고독한 총잡이 주인공에, 이제는 액션 스릴러 장르 아래에서 일종의 하위 장르를 형성한 것이나 진배없는 '아이 보호하는 아저씨 이야기'까지. 어찌보면 드라마는 꽤 뻔한 이미지와 상황들로 전개된다. 하지만 그걸 끝내주게 잘했다. 그래서 할 말이 없다. <만달로리안>은 그 옛날 할리우드의 웨스턴 장르, 그리고 일본의 찬바라 장르를 그대로 끌어온다. 어찌보면 원점 회귀다. <스타워즈>는 그때도 지금도 언제나 악한들에 대항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였으니. 그 구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하고 밀어붙인 게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연출한 네번째 에피소드. 산적들에게 주기적으로 털리는 시골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을 외부에서 들어온 무법자들. 이건 그냥 노골적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스타워즈> 세계관에서 오마주하겠다 이거잖아. 

조금 빠른 결론. 그동안 팬들이 간절히 원했지만, 정작 보상 받지는 못하고 있던 이야기와 스타일의 드라마라는 것. 나는 <스타워즈>의 오랜 팬이었고, 심지어 여덟번째 에피소드였던 <라스트 제다이> 마저도 옹호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하루 빨리 스카이워커 가문의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라고 언제나 생각해왔다. 그래야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그래서 <만달로리안>은 내게 굉장히 기쁜 경험이었다. 나, 그리고 나와 같은 주장을 해왔던 팬들의 생각이 결코 틀린 게 아니었음을 증명해주는 드라마였기 때문에. 

사실 본가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9부작 스카이워커 사가만 본 사람들이라면 장고 펫과 보바 펫, 그리고 찔끔찔끔씩 등장 하는 만달로리안들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실사 영화 시리즈 내에서는 생각보다 깊이 탐구되어 본 적이 없는 종족 또는 집단이란 것인데, <만달로리안>은 그렇게 그동안 차근차근 정립되어온 <스타워즈> 위키 내의 정보들과 새로운 설정들을 잘 뒤섞어 만달로리안을 굉장히 매력적인 형태의 캐릭터들로 재조립 해냈다. "This is the way"로 대변되는 그들의 계율과 또 그로인한 당파적 싸움. 베스카로 철컹철컹 지지고 볶으며 업그레이드 되는 주인공의 전신 갑주. 모호하게 설명 되기만 했던 설정에 꽤 그럴듯한 실질적 묘사들을 더해 현실감을 얻어낸. 개별 에피소드들을 연출한 감독 각자의 공도 크겠지만, 무엇보다 쇼러너인 존 파브로의 존재감이 대단하다. 이 양반은 철갑옷 두른 주인공 이야기 하나는 언제나 엄청 잘 만드네.

또 앞서 말했듯이, 전반적인 프로덕션 디자인 곳곳에 배어든 더스티한 느낌이 너무 좋다. <스타워즈> 특유의 중고품 같은 현실 감각. 여기에 뭔가 토속적인 느낌까지 주는 루드비히 고란손의 메인 테마까지. 전체적으로 <스타워즈>의 강점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반영해낸 올라운더형 작품. 아, 고독한 현상금 사냥꾼 총잡이 이야기 너무 좋다. 아직 시즌 2 감상이 남았지만, 앞으로 이런 방식의 드라마나 영화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거지같은 에피소드9으로 스카이워커 사가는 얼추 마무리 했으니, 이제는 우리 앞에 펼쳐진 저 넓은 미지의 우주를 향해 나아갈 때다. 

2022/01/19 18:32

아케인 SE01 연속극 대잔치


이건 <위쳐> 보다 더 하다. <위쳐>는 원작 소설까진 못 읽어봤지만, 그래도 CD 프로젝트 레드가 만든 게임의 3편은 재밌게 했던 경험이 있었거든. 그 상황에 비하면 <아케인>의 처지는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원작이 되는 게임, 내 나이대의 동성 친구들은 누구나 다 해봤던데. 근데 나는 진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걸랑. 고로 세계관이나 인물들 설정도 모르고,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역시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케인>이 증명 해낸 것도 있다. 단순하고 어찌보면 당연한 명제이지만, <위쳐> 드라마를 포함해 너무나도 많은 리메이크작들이 간과하는 바로 그것. 원작에 기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작품 자체가 가진 순수 재미라는 진리. <위쳐>가 순수 재미 0%에 수렴하는 시리즈였다면, <아케인>은 못해도 90% 이상의 순수 재미를 보장 해낸다. 그러다보니, 원작 게임이고 나발이고 알게 뭐람. 원작을 안 봤어도 상관 없어, 존나 재밌으니까. 

내가 평소 좋아해마지 않는 이야기 설정이란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돌아선 관계'들에 흥미를 느껴왔다. 그 겉껍질이 액션이든, SF든, 멜로든 간에. 그 누구보다 가깝고 친밀한 관계였지만, 모종의 사건과 오해들로 인해 끝끝내 서로에게서 돌아서버린 사람들. 아나킨과 오비완이 그랬고, 스티브와 토니가 그랬으며, <소셜 네트워크>의 마크와 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언제나 그런 이야기에 끌린다. 그리고 <아케인>은 나의 그런 취향을 정확히 조준해냈다. 어찌보면 굉장히 뻔한 설정에 고루한 전개지만, 그럼에도 시즌 초반 3화동안에 바이와 파우더 자매의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켜냄으로써 그 전형성을 어느 정도 뚫어냈다고 볼 수도 있을 거다. 

서로를 형제 또는 남매 또는 자매로 여기던 둘이 기어코 갈라서게 되는 이유들은 대개가 다 비슷하다. 첫번째는 가치관의 차이요, 이어지는 두번째는 보통 순간의 감정으로 인한 오해 때문. 가치관 때문에 갈라지게 된 건 아나킨 & 오비완, 스티브 & 토니가 그랬다. <아케인>의 바이와 파우더는 두번째 경우다. 헛되이 치른 희생, 그리고 도우려다 벌어진 참사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결국 바이와 파우더는 갈라지게 된다. 이후 둘은 각각 필트오버와 자운을 대표하고 수호하는 인물들로 변모하는데, 사실 가치관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잖아. 바이야 상황상 동생을 구하고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해 필트오버 편에 잠시나마 선 것이지, 사실은 그녀 역시 자운 출신 현실주의자니까. 파우더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자운의 가치관이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그 모든 사단을 벌인 건 아니니. 그녀가 원했던 건 그저 기댈 곳이었을 뿐. 자신이 버려지지 않았다는, 자신 역시 쓸모 있다는. 자신의 가치 증명과 또 그에 상응하는 애정을 갈구 했을 뿐인 거다. 

앞서 말했듯 그 이야기와 전개의 전형성까지 어쩔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바이와 파우더 각 캐릭터, 그리고 그 관계가 워낙 매력있게 잘 뽑혀 보는내내 감정적인 동요가 생긴다. <시스의 복수><시빌 워>가 그랬듯이,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보통 보는내내 '아, 제발 서로에게 그러지 마'라는 생각을 관객들이 끊임없이 해야 성공인데 이 부분에서 <아케인>은 유효한 적시타를 이뤄냄. 물론 그 외의 캐릭터들 역시 굉장히 잘 조형되어 있고. 끝판왕 악역이지만 살리에르 콤플렉스로 징크스와 관계 맺는 실코의 입체감, 본편의 주요 전개와 다소 동떨어져 있는 듯 싶음에도 부여받은 각자의 이야기에서 성실히 달려나가는 제이스 및 빅토르 등.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많음에도 불필요하다거나 낭비 되었다는 느낌이 없다. 감독의 용병술이 탁월한 축구 팀 보는 느낌이랄까. 

<아케인>의 또다른 강점은 스타일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로써 갖는 탁월한 스타일. 마치 바이와 징크스처럼, <아케인>은 오소독스와 사우스포를 오가며 그 강점을 드러낸다. 전형적이지만 탄탄한 이야기 구조, 그리고 거기에 품어둔 주제와 메시지. 이는 오소독스 바이처럼 단단하다. 반면, 액션과 그를 담아내는 작화 및 표현은 사우스포 징크스 마냥 변주 가득하고 날래다. 징크스의 조현병 증상을 표현하는 부분이라든가, 점화단의 공중 액션을 묘사하는 부분 등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서만 가능한 화려함이다.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이후 꽤 오랜만에 체감하는 애니메이션의 마력. 모든 게 가능한 매체이니 그 연출의 묘가 더 중요했을 텐데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수준. 

원래는 볼 생각이 단 1%도 없던 시리즈였으나, 시작한지 반나절 만에 시즌 피날레까지 쭉 달렸다. 시즌 2 얼른 나왔으면 좋겠고, 게임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바이와 징크스가 그나마의 좋은 결말을 서로에게 얻어냈으면 좋겠다. 

2022/01/17 16:17

에밀리 파리에 가다 SE02 연속극 대잔치


지난 시즌을 예상 외로 꽤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에피소드별 런닝타임도 간소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인 에밀리가 쉽게 기죽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답답한 상황이 덜 발생해 재미있었다. 그런데 나이브한 에밀리의 그 태도가, 이번에는 시즌 2의 발목을 잡는다. 쉽게 꿇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든든했던 그녀가, 이제는 뒷일은 생각도 안한 채 마구 돌격하는 천둥벌거숭이로 느껴져 열 받는다. 

도가 지나쳤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제아무리 성적으로 열린 프랑스 파리라지만, 에밀리가 품은 남자들은 그저 원나잇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섹스를 원했던 것일 뿐이었다면 좀 더 가볍게 갔어야지. 그러나 에밀리는 바로 뒤를 생각지 못하고 그저 들이댄다. 시즌 1 말미에 가브리엘과 했던 섹스, 그래도 그건 이해할 수 있다. 가브리엘은 카미유와 헤어진 이후였고, 무엇보다 에밀리 역시 가브리엘과의 마지막 만남으로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가브리엘은 파리에 남기로 한다. 앙투완이 레스토랑에 투자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땐 레스토랑 때문이 40%고 에밀리 때문이 60% 정도 된다. 

근데 에밀리는 카미유와의 친구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간다. 가브리엘과의 뜨거웠던 그 밤을 철저히 숨긴채. 그렇다고 거짓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님. 카미유가 좀 둔해서 그렇지, 나였으면 벌써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뭔 가브리엘 이야기만 나오면 벌벌 떨고 그래. 게다가 에밀리는 카미유의 어린 남동생과도 잤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 첫 등장한 영국인 알피와도 자고... 클럽에서 만나 가볍게 하룻밤 상대로 즐기거나, 그도 아니면 따로 소개팅을 받아 데이트 하다 자던가. 그러나 지금의 에밀리는 든든한 관계 안에서 불안불안한 만남을 지속해 간다. 내가 카미유였으면 한 대 쳤다. 

데이트나 섹스에서 뿐만이 아니다. 에밀리는 사정없이 지르고, 그 뒷수습을 미래의 본인 또는 타인에게 떠맡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싹수 노란 싸가지는 아니다. 그녀는 그냥 순수한 거다. 근데 사회 생활 해보면 알겠지만, 충분히 과도한 순수함은 멍청함과 구별할 수 없다. 이쯤 되면 순수한게 아니라 그냥 멍청한 거다. 

주인공이 나오는 내내 답답함을 선사하고 있으니, 제아무리 파리의 풍광이 아름답다 한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미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아, 아니지. 미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 멍청함이 사리지는 건 아니잖아? 하... 정말이지 오랜만에, 내 안의 유교 본능이 끓어 오르던 드라마. 에밀리 청학동 가서 훈장님한테 훈계 좀 들어야할 것 같다. 

2022/01/17 15:53

위쳐 SE02 연속극 대잔치


시즌 1을 보며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괴물 잡는 의뢰 위주로 보여주는 게 거시적인 국제 분쟁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재밌었을 거라고. 물론, 그렇다고해서 그 거시적인 국제 분쟁 이야기가 마냥 재미없는 건 또 아니었다는 말도 했다. 그냥 팔 괴고 보게 되는 정도였다 했지. 그리고 시즌 2 다 보고 느낀 것 역시 그 시즌 1의 감상과 똑같다. 다만 이번엔 팔 괴고 보게 되는 정도가 아니었음. 괴고 있던 팔로 베개 만들 정도의 수준. 한마디로 더럽게 재미없었다. 

말이 괴물 사냥꾼 위쳐지,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현상금 사냥꾼과 진배없다. 고로 장르와 분위기는 딴판이지만 디즈니 플러스의 <만달로리안> 같은 구성으로 갔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라 본다. <만달로리안>도 에피소드 별로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론 만도와 그로구의 드라마인 거잖아. 그와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위쳐> 역시 유사하게 갈 수 있었고 그게 훨씬 더 재밌었을 것이다. 각 에피소드 마다 새로운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를 갖고 등장해 게롤트에게 의뢰를 던져주고, 또 그 의뢰 안에서 게롤트는 시리나 예니퍼 등과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는 전개. 그게 훨씬 재밌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왜 이런 소리까지 하냐면, 시즌 2 내내 나오는 정치 드라마가 진짜 오질라게 재미없걸랑. 

시즌 1의 <덩케르크>적 자세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시즌 2 역시 이곳 저곳을 쉴새없이 왔다 갔다 하는 전개로 일관한다. 그나마 게롤트와 시리의 이야기는 일정 부분 볼만하다. 하지만 그외 교차편집되는 나머지 부분들은? 진짜 진심으로 죄다 재미없음. 북부 왕국과 닐프가드의 대립은 실체없이 그냥 구닥다리 같은 느낌이고, 갑자기 튀어나온 엘프들은 존나 너무 느닷없어서 뭐라 말할 건덕지도 얺다. 

다행히 많은 등장인물 수에 비해 나름 정리는 잘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닐프가드 진영 내의 사람들과 엘프들, 르다니아 내의 정치 공작, 케어 모헨에 거주하고 있는 베스미어 & 위쳐들까지. 하지만 구획 정리만 잘 해두면 뭘해, 가장 큰 문제는... 게롤트 외 인물들 이야기가 다 재미없는 거라니까? 거의 순수 재미가 0에 수렴하는 정도임. 물론 이건 내 잘못일 수도 있다. 원작 소설 읽어본 적도 없고, 관련 콘텐츠라고 해봤자 CD 프로젝트 레드가 만든 게임 3편 뿐이니.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나, 알고 본다고 이게 달라지냐? 그냥 전개가 존나 재미없는 건데. 

갑툭튀한 엘프들은 진짜 열 받는다. 물론 난민 이슈나 인종적 갈등 등, 현재 우리네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은유로써 그들을 활용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그 더러운 차별들을 차치하고라도, 엘프들의 리더 하는 짓거리가 너무 역겨움. 한창 임신 중일 때는 인간들과의 결속 운운하더니, 아이를 낳자마자 마음이 바뀌어? 의무 없는 권리만 존나 주장한다. 이건 이 드라마를 보는 내가 인간이 아닌 엘프였어도 인정했을 부분. 

더불어 판타지 드라마로써도 문제가 있는데, 이 대륙의 양감이 너무나도 쪼그라들었다는 것이다. 중간계처럼 거대하다는 느낌이 없다. 심지어 에픽 하이 판타지라 부르긴 애매했던 <해리 포터> 세계의 영국이나 심지어는 호그와트 보다도 더 작게 느껴짐. 스켈리게 같은 타 지역은 그저 대사로만 간접 언급될 뿐이고, 그외 나머지는 엄청 조그맣게 묘사되는 듯하다. 옆 제국으로 건너가는데도 배 타고 반나절이면 되고, 교역로 그냥 지나다니다 보면 우연히 아는 사람 엄청 만남. 아니면 그냥 게롤트가 핵인싸라 지나가는 사람 다 알고 있는 건가? 하여튼 7화에서 게롤트와 야스키에르가 드워프 친구들 만나는 장면에서 뻘하게 터짐. 조선시대 한양으로 과거 시험 보러 가는 루트 같은 건가? 다 거기서 만나게? 

대충 퉁신 동선 묘사도 꽤 많다. 예니퍼와 시리는 신트라 외곽에서 언쟁을 벌인다. 그리고 그 결과로 땅이 갈라지고 신트라의 성벽이 쪼개지지. 근데 쪼개지자마자 신트라는 병사들을 그쪽으로 보낸지 한참 후처럼 묘사된다. 그럼 그동안 예니퍼와 시리는 그냥 거기 계속 멀뚱하게 서 있었던 거임? 아니면 신트라 경비대의 반응과 일처리 속도가 5G급인 건가. 

<위쳐> 이야기의 본령은 회색지대에 있다. 선한 선택도, 악한 선택도 없는. 애매모호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그런 선택의 과정들을 에피소드 마다 각기 다른 컨셉으로 쪼개 보여줬더라면 다른 건 몰라도 순수 재미는 더 높지 않았을까. 근데 드라마에서 순수 재미 빼면 대체 뭐가 남냐, 주제? 그래봤자 '차별말고 우리 함께 잘 살자'라는 존나 구태의연한 주제 밖에 캐치 안 되던데. 

2022/01/17 14:57

플립, 2010 대여점 (구작)


영화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배운 것들 중, 자꾸 반복해서 듣게 됐던 게 있다. 영화는 명백한 시각 매체이니, 내레이션이나 대사 등의 비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극중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이미지로써 전달하는 게 좋다는 것. 그래서 미장센이 중요하다는 소리. 나는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장들 역시 시각적 요소에 좀 더 탐닉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 그 관점에서 점수를 매기자면, <플립>은 빵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레이션 투성이거든. 그러나 이상하게도, <플립>은 그 내레이션 투성이의 구성이 영화의 이야기와 잘 어울려 좋은 효과를 빚어낸다. <플립>은 소설이나 에세이 보다는 일기장에 좀 더 가까운 영화거든.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인 어린 시절, 줄리와 브라이스는 첫 만남을 가진다. 그리고 거기서 부터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줄리는 브라이스를 좋아했다. 하지만 반대로, 브라이스는 줄리를 부담스러워 버겁게 느꼈고. 슬프게도, 우리네 현실은 거의 대부분 일방적으로 시작된다. 내가 그를 좋아하다 보니, 그 역시도 내가 좋아지는 순간. 물론 있겠지. 대부분의 커플들이 다 그렇게 시작되는 거고. 하지만 조금의 성공이 있으면 더 많은 실패가 있는 법. 내가 그를 좋아하지만, 그는 그런 나를 좋아하지 않는 순간이 우리네 인생에서는 대부분이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조금씩 더 슬프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확률, 그걸 수학적으로 계산한다면 그 답은 무엇일까. 명백히 0이라거나 그에 수렴 되지는 않겠지만, 못해도 2/10 정도 확률 밖에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나머지 8/10은......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어느 순간 어느 상황에라도 '선택'할 수 있다. 그게 최대한 인간적인 선택이라면 좋을 거고. 그 점에서 브라이스는 낙제점을 받을만 하다. 물론 줄리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 그게 브라이스의 마음인 걸. 하지만 그럼에도, 줄리의 마음을 조금씩은 헤아려 줬어야지. 그녀가 꾸준히 선물하는 계란을, 못 먹겠다 말할지언정 쓰레기통에 꾸준히 버리지는 말았어야지. 그녀의 삼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든지 간에, 적어도 남들의 웃음에 동조하지는 말았어야지. 초등학생이라는 걸 감안하고 봐도 브라이스가 내린 선택들은 하나같이 다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플립>은 성장 영화로써 자신의 주인공들 중 한 명인 브라이스를 친절히 대해준다. 다름 아닌 그의 일기 형식을 빌려서. 각각 브라이스와 줄리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대변해가며 진행되는 영화의 스타일 덕에, 우리는 엇갈린 상황 속 그들의 내면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일기라는 게 언제나 그렇지만, 각자의 입장과 변명들을 잘 듣게 되지. 그 점이 성장 영화로써 <플립>이 가진 강점 되시겠다. 풋풋하고 설레면서도, 각자의 이야기를 귀담아 잘 들어주는 성장 영화랄까. 

줄리 아빠로 나오는 에이단 퀸. 최근 <가을의 전설> 다시 보며 그의 젊은 시절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있었는데, 이렇게 나이 든 모습으로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아, 무적의 10월생 동생을 두고 속 썩던 그가 이렇게 나이 들어 어린 딸과 살고 있다니. 참으로 세월이 무상하다. 

2022/01/17 14:17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극장전 (신작)


원작 뮤지컬, 그리고 1961년에 나온 영화. 둘 다 본 적이 없다. 고로 뭔 내용인지 진짜 1도 모르고 봤다는 거. 그런데도 이 영화를 기대하고 있던 이유는 오로지 감독 때문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내게는 언제나 꿈의 이름일 남자. 할리우드의 올타임 넘버 원이자 리빙 레전드. 그 긴 감독 생활 중 이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첫 뮤지컬 장르 도전이라고? 오히려 좋아, 오히려 기대돼. 나의 영웅이 만드는 뮤지컬 영화는 과연 어떨까. 진짜 이런 충만한 기대감으로 극장을 찾았던 것이다...... 근데 왜 보면 볼수록 주인공 커플 둘 모두의 얼굴에 죽빵 한 방씩 꽂아넣고 싶어지는 거냐.


웨스트 스포일러 스토리!


일단 명백하게 좋은 점부터. 스필버그의 연출이 대단하다. 물론 이제와 스필버그가 연출 잘하는 감독이라고 떠들어봤자 바닷물 짜단 소리 밖에 안 되겠지. 그럼에도 비주얼리스트로서 이야기를 수식하는 방식이 걸출한 건 사실이라 언급 안 하고 갈 수가 없다. 솔직히, 영화의 오프닝 쇼트에서 부터 나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량하다 못해 위험해보이는 재개발 지구를 천천히 쓱하고 훑는 카메라. 그리고 이어지는 그 곳의 미래 가상도. 철저하게 계산된 카메라 무브먼트로 영화의 시공간적 상황과 분위기를 대번에 제시해버리다니. 

여기에 인물을 담는 방식 또한 스필버그 답게 여전히 훌륭한데, 인생 첫 뮤지컬 장르 연출이라는 수식이 무식하게 뮤지컬 넘버 장면들 역시 꽤 볼만하다. 특히 중반부, 미국 찬가를 부르는 아니타와 푸에르토리코 찬가로 대립하는 베르나르도 사이 뮤지컬 넘버는 정말이지 대단했다. 치마폭을 화려하게 휘날리며 걷는 여성들과, 잘 조율된 타이밍으로 멋진 합을 보여주는 남성들의 댄스 장면. 춤의 동작마자 영화적 움직임으로 끌어오는 거장의 휘황찬란한 실력에 기가 찼고, 과장 좀 보태 극장에 앉아 찔끔 눈물을 흘렸다. 전혀 슬픈 장면이 아닌데도, 그냥 너무 아름답고 좋아서. 나의 롤모델은 여전히 뚜벅뚜벅 걷고 계시는 구나. 고여있지 않은채, 꾸준히 흐르고 계시는 구나. 

이렇게 좋은 점만 쭉 읊다가 글을 마무리할 수 있는 영화였다면 좋았으련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품은 단점은 그 장점들 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그 단점의 주요 골자는, 원작이 갖고 있는 이야기가 2022년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는 지나치게 올드 하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굳이 편 좀 들자면, 전적으로 스필버그의 잘못이나 실수라기 보다는 원작이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난점들이 존재했다는 것. 고로 감독인 스필버그나 각색가가 이런 부분들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해 변주 했다면 더 좋았을 거다. 

한마디로 너무 고전적이다. 구닥다리란 느낌이 들 정도로. 토니와 마리아는 만난지 하루, 아니. 하루가 뭐야. 반나절도 안 돼. 물론 '첫눈에 반한다'의 이야기는 해당 장르에서 전통 마냥 오래도록 이어져왔다. 현실을 사는 나는 그것을 믿지 않지만, 어쨌거나 안 될 것도 없다는 거. 그러나 둘은 첫눈에 반한 것과는 별개로, 만난지 3분 만에 키스를 해버린다. 그리고 곧바로 헤어졌는데, 그 키스가 얼마나 좋았는지는 몰라도 그 직후 토니는 마리아의 이름을 연신 부르짖으며 그녀를 자신 평생의 사랑으로 명명 해버린다. 그리고 창문가에서 다시 조우한 둘. 둘은 만난지 총합 10분도 안 되어 사랑의 야반도주를 꿈꾼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날의 첫 데이트. 여기가 진짜 웃겨. 첫 데이트에서 서로에 대해 잘 알기도 전에, 둘은 신을 증인삼아 무릎을 꿇고 결혼 비스무리한 것을 한다. ......이 모든 게 만난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적 리메이크였다면 그냥 넘어갔을 부분이다. 그건 몇 백 년 된 고전이니까. 그리고 그 시절엔 그럴 수 있었지. 상대방 얼굴도 모른채로 어린 나이에 결혼하던 게 일상이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이야기는 그 정도로 오래되진 않았다. 재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그럼에도 스필버그는 그 구시대적 이야기를 해체 및 변형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왜 원작이 되는 이야기에 원리주의적 태도를 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게 영화를 망쳤다고 나는 여겨진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란 것이다. 정신이 진정 아득해지는 순간은, 영화의 클라이막스다. 토니는 마리아와의 관계를 설득하려다, 우발적으로 그녀의 친오빠인 베르나르도를 칼로 찔러 죽인다. 여기서도 멍-해지는데, 친오빠를 죽인 직후 자신을 찾아온 토니와 마리아는 동침을 한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아니, 잠깐만. 내 남자친구가 내 친오빠를 죽였는데, 그런데도 그 남자친구와 곧바로 동침을 한다고...? 심지어 오빠 죽이고 10년쯤 뒤에 찾아온 것도 아니다. 죽이자마자 찾아왔는데도 마리아는 그를 용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니타를 상대로한 마리아의 자기 사랑 합리화 뮤지컬. 아니, 아니타는 자기 남자친구가 죽은 상태잖아. 근데 마리아가 아니타를 상대로 그 살인자 옹호 뮤지컬 넘버를 부른다고? 그 순간부터 마리아를 한 대 치고 싶어졌다. 토니랑 같이 일렬로 세워두고 죽탱이를 한 대씩 갈기고 싶어졌다. 사랑 앞에 옳고 그름은 부질 없다고요...? 그 노래 피해자 유족 앞에서 한 번 불러봐요. 아... 본인이 그 유족이지... 씨바 그래도 이건 아닌 거잖아

사랑 이야기는 고리타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친오빠의 원수를 감싸고 도는 꼴 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빠 죽은지 채 반나절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살인자와 야반도주 하려 싼 짐가방 들고 신나서 달려오는 꼴 좀 봐라. 거기서 만큼은 감독이 스필버그든 스콜세지든 상관 없었다. 심지어 큐브릭이나 아키라가 드래곤볼로 살아 돌아와 연출했다해도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원작의 그 클래식함이 독이었다. 그리고 스필버그는 그게 독인줄 알고도 덥썩 베어물었다. 하... 감독님, 도저히 바꿀 수는 없으셨던 건가요? 이게 최선이였던 건가요?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