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24 16:02

캐리비안의 해적 - 블랙 펄의 저주, 2003 대여점 (구작)


사실상 주인공은 잭 스패로우가 아니라 윌 터너였다. 아버지 콤플렉스는 물론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까지. 이거야말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주인공들이 거치는 통과의례 패키지 한 묶음 세트 아니겠나. 그리고 윌 터너는 그걸 썩 잘해내는 주인공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나긋나긋한 말투, 그러면서도 신사적이고 테가 멋진 검술 실력까지. 근데 연기한 배우가 올랜도 블룸. 게임 셋.

영화의 주인공은 점점 성장해나가서 결말부쯤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는 시나리오 공식을 갖다붙여 보아도 이에 반응할 수 있는 건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 스완 정도 뿐이다. 윌 터너는 해적을 증오하고 소심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사랑하는 여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인물에서, 점차 대범해지며 사랑을 위해선 신분은 커녕 목숨까지도 걸 수 있는 해적으로 변모한다. 엘리자베스 스완 역시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숨겨진 사랑을 끝내 해방하고, 아닐 때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으로 탈바꿈. 이것이야말로 주인공 정석 코스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영화 내 등장도 둘이 가장 먼저 함.

여기까지만 하고 별 게 없었더라면 잘 만들었을 뿐 특출난 매력은 없는 영화였을텐데, 영화는 여기에 한 가지 특급 조미료를 가세시킨다. 바로 잭 스패로우.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또라이 해적 선장을 만들어놓고 심지어 엄밀히 따지면 주인공 포지션도 아니면서 주인공보다 멋있게 던져놨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이야기할 때, 주인공을 윌 터너로 못 느끼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들 이 시리즈를 잭 스패로우의 시리즈라고 생각하지, 누가 윌 터너의 시리즈라고 생각하겠나. 심지어 4편에서는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 스완 출연하지도 않았으니. 첫 등장부터 비범한 허세를 선보이지만, 잭 스패로우가 호감인 건 그게 다 허세임을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세를 로망으로 치환해버리는 때묻지 않은 쾌활함. 무장해제 될 수 밖에 없지.

달빛 아래 블랙 펄의 갑판에서 엘리자베스 스완과 해적 일당들이 벌이는 씬은 흡사 뮤지컬을 보는 듯 했다. 아, 이게 디즈니 스튜디오 영화란 걸 여기서 인증하는 구나 싶은.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은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액션 설계나 동선은 꼼꼼 하면서도 창의적이다. 이 시리즈 액션의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점입가경 액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잭 스패로우가 포트 로얄에서 펼치는 첫번째 도주 시퀀스. 엘리자베스 스완을 밀치며 시작되는 액션이 대장간에서 윌 터너와 대결을 펼치는 장면으로까지 이어지는데, 반복과 유머로 덧칠한 그 리듬감이 좋고 특히나 점점 싸움판의 레벨이 고차원적으로 변해간다는 특징이 재미있다. 대장간 맨바닥에서 싸우다가 수레 위에 올라서서 시소 타듯이 대결을 펼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천장 나무 구조물 위에 올라서서 싸움을 이어가는 그 과정과 리듬. 이 같은 특징은 시리즈 내내 지속되는데, 역시 가장 크게 터진 건 2편의 중후반부 물레방아 대결이겠지.

저주와 복수의 이야기 자체는 단순한데 그 단순한 이야기를 잘 뽑아먹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잭 스패로우와 바르보사, 윌 터너 사이의 묘한 감정선과 기류를 보는 맛이 좋음. 시리즈 자체에 대한 개인적 호감도는 1>2>3>4 이 정도인데, 1이 가장 앞에 있는 이유로는 아마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는 이야기라 그런 것 같다. 어쨌든 2편과 3편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는 느낌이 좀 있거든. 4편은 그냥 별로고. 어쨌거나 전세계적으로 돌풍급 대박을 친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해적 장르를 살리기는 커녕 시리즈 자체의 동력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으니, 어쩌면 이 1편이야말로 독이 든 성배가 아니었을까.

뱀발 - 한스 짐머의 음악은 그 자체로 대체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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