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3 12:33

악녀 극장전 (신작)

길게 할 말이 없다. 21세기 한국에서 신 여전사를 보여주겠다 호언장담 했으나, 결국 그 여전사를 액션으로 이끄는 동기도 딸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다. 제목부터가 '악녀'였다면, 좀 더 이기적인 이유가 싸움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싸우는 방식도, 좀 더 강렬하고 야비하고 비열하게 묘사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둠>에서 후반 20분동안 묘사했고, 이후 <하드코어 헨리>에서 아예 풀타임으로 구현했던 1인칭 액션 시퀀스로 영화가 시작된다. 이 영화의 야심이나 톤 앤 매너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너무 과시적이고 동시에 드라마로는 빵점이다. 아직 주인공 소개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황에서 다짜고짜 액션부터 밀어붙이는 방식, 다른 많은 액션 영화들에서도 해왔던 것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악녀>의 이 오프닝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가장 감정적으로 중요하고 스펙터클로써도 가장 핵심이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장면을 다짜고짜 던져놓았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도 이해 안 되는 것. 오프닝 당시의 주인공은 국가정보원에 소속 되기도 전인데, 어찌 그리 일당백의 싸움 실력을 갖고 있는 것인가. 연변 사람들은 다 그래? 웃기고 자빠졌네.

레퍼런스들이 너무 훤히 보인다는 것도 문제다. 물론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영화에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봐온 수많은 명작들에서도 다른 영화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니까. 허나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구체적인 레퍼런스를 떠올리게 된다는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문제다. 보다보면 <브이 포 벤데타>나 <도둑들>에서 본 장면 설정도 있고, <레옹>이나 <니키타>는 물론이거니와 <레이드>스러운 장면도 있다. 여러모로 짜깁기 티를 너무 많이 내는 영화. 

다 떠나서, 비 내리는 날 버스에서 우산없이 내리는 여자가 나오는 장면에서 프레임 안으로 남자의 우산이 서서히 들어올 때부터 느꼈다. 아, 이 영화는 글러먹었어- 라고. 대체 이게 무슨 쌍팔년도 감성인가. 보다보면 영화가 아니라 TV 드라마 스페셜 보는 느낌도 들고, 심지어는 돈 좀 많이 들인 영화학교 졸업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사도 최악, 연출도 최악. 김옥빈이나 신하균, 김서형 정도는 그래도 고생했다 박수쳐줄 수 있으나, 방성준의 연기는 쉴드가 불가한 것도 있다.

드라마가 후지니 액션에 몰빵한 느낌인데, 영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점잇기 놀이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감독 입장에서 찍고 싶은 액션 장면이나 컨셉을 먼저 정해놓고, 그 지점까지 도달하는 데에 최소한의 드라마로 점잇기를 했다는 의심. 막말로 시나리오 쓸 때 하얀 웨딩 드레스 입고 긴 저격총으로 상대를 저격하는 모습의 신부를 설정 해놓고, 그 컨셉까지 도달하기 위해 갑자기 여주인공을 결혼 시키질 않나 결혼식날 과거 사랑했던 남자를 죽이라고 미션을 주질 않나... 정병길 감독은 인터뷰에서 시나리오 2주만에 썼다고 했던데 그 티가 난다. 날티.

사실 짧게 쓰려 했는데 욕 하다 보니 길어졌네. 어쨌거나 저쨌거나 올해의 B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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