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5 17:52

다키스트 아워 극장전 (신작)


가끔 영화가 걸작이든 망작이든 관계없이 나를 샘나게 하는 감독들이 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고하고, 테크닉에 관해서 자유자재인 감독들에게 그렇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다소 플랫한 정공법을 쓰는 연출자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는 조금 고리타분한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타란티노나 매튜 본 같은 감독들을 좋아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다키스트 아워>는 집 근처 동네 CGV에서 심야영화로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집까지 걷는 그 20여분동안 혼자 새벽길을 묵묵히 걸으며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뿜었다. 조 라이트의 연출이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에 비해 너무 스타일리쉬하고 테크닉적으로 뛰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과시적이란 생각도 조금 든다. <어톤먼트>부터 어느 정도 정립되었던 조 라이트의 연출이, <다키스트 아워>에서는 조금 과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잘 맞는단 생각은 또 든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주 배경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 박진감 넘치는 전투 액션 씨퀀스는 없을 뿐더러, 시종일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등장해 말로만 관객을 조지려든다. 만약 여기에 조 라이트의 스타일리쉬한 연출이 없었더라면 영화는 더 지루해지지 않았을까.

영화의 초반부 연출이 흥미로운데, 윈스턴 처칠을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첫 씨퀀스와 두번째 씨퀀스에까지도 처칠은 코빼기 하나 안 비춘다. 그저 조연들의 언급으로만 등장하는데, 그러다가 비로소 세번째 씨퀀스에 와서야 처칠이 등판. 인상적인 건, 그의 첫 등장이 아주 깜깜한 그의 침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너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방에 갑자기 담배를 위한 성냥불이 처칠의 얼굴만을 환하게 비춘다. 그야말로 어두운 다키스트 아워 때 빛이 되어준 윈스턴 처칠이란 캐릭터를 명확하게 요약해 보여주는 명연출.

하지만 조 라이트가 그렇게 연출로 조지고 부시고 했음에도 이 영화는 결국 게리 올드만의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로 조지고 부시고 했음에도 <다크나이트>가 온전히 히스 레져의 영화였던 것처럼.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 영화에선 진짜로 게리 올드만이 안 보인다. 분장의 역할도 크지만 배우의 연기가 더 크다. 게리 올드만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것은 그의 목소리뿐. 나머지는 죄다 윈스턴 처칠의 환생 그 자체다. 게리 올드만은 느릿느릿하고 게을러보이는 처칠 특유의 평소 이미지를 잘 묘사하다가도 분노와 억울함을 내뱉어야할 부분에서는 변속을 가해 인물을 끓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고집불통에다가 강인한 남자를 연기하다가도 순간적으로는 고독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남자의 모습까지도 번뜩번뜩 비춰준다. 게리 올드만이 이번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전쟁날 일일 것이다.

게리 올드만 외에 <베이비 드라이버>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릴리 제임스 역시도 괜찮다. 배우는 참으로 작품 선택이 중요하구나 라는 걸 느끼게 만들어준 배우이기도 한데, <베이비 드라이버>를 영화관에서 처음 봤을 당시엔 생면부지의 배우인 줄 알았었다. 근데 알고보니 역시 영화관에서 봤었던 실사판 <신데렐라>의 주인공이기도 했다잖아. 전혀 몰랐고 얼굴도 기억이 하나 안 나는데. 근데 <다키스트 아워> 속 릴리 제임스를 보면서는 '어? <베이비 드라이버>에 나왔던 배우인데?'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신데렐라> <<< <베이비 드라이버>란 이야기.

벤 멘델슨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어쩌다 보니 출연작을 많이 보지 못했음에도 최애 배우 등극. 그 특유의 고급스러운 발음이 좋다. <로그 원>에서도 진짜 좋아했는데. 스필버그 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에도 나오는 것 같더라. 기대해봅니다, 벤 형.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런 생각도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와 세트로 묶어 상영하고 다녀도 참 괜찮겠다고. 놀란의 그것이 현장의 영화였다면, 라이트의 이것은 배후의 영화다. 안 그래도 2차 세계대전 영화들 좋아하는데 이렇게 기질이 다르면서도 훌륭한 두 연작을 찾아낸 듯 싶어 기분이 더 좋음.

연출이 이 영화의 돌격소총이라면, 연기는 이 영화의 탱크다. 조 라이트가 밀어주고, 게리 올드만이 앞에 나서서 조지고 부시고 뚜까 패는 영화. 상영관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텐데.

뱀발 1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로 <다키스트 아워>란 제목을 달고 개봉 시키다니. 이 정도는 번역해도 괜찮지 않냐.
뱀발2 - 포스터에 <어톤먼트> 대신 <오만과 편견>을 넣은 이유는 뭘까. 한국에서도 전자가 더 인지도 있고 팬층도 두터울텐데. <팬> : 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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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d 2018/01/26 23:56 # 삭제 답글

    릴리 제임스가 신데렐라였다는걸 여기서 처음 알았습니다. 진짜 작품이 중요하긴 하네요. 신데렐라에선 그렇게 안 예뻐 보였는데;
    게리 올드만의 연기와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이 정말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스토리는 좀 지루해서 졸 뻔 했지만요.
  • CINEKOON 2018/01/29 18:23 #

    <신데렐라>에서 기억에 남는 건 헬레나 본햄 카터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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