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4 23:12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극장전 (신작)


델 토로는 딱 두 종류의 영화를 만든다. 시상식용 걸작이거나 본인 덕질용 평작. '걸작'은 말그대로 걸작이니 박수를 보낼 만하고 '평작'은 평이 하더라도 할리우드라는 메인 스트림에서 본인의 덕업일치를 이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덕질 범위가 나의 덕질 범위와 묘하게 잘 맞기 때문에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박수를 보낸다. 한마디로 내가 좀 편애하는 감독이라는 셈. 사실 이 영화, 본지 이미 열흘 정도가 된다. 열흘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이 영화는 시상식용 걸작인가, 아니면 덕질용인가. 결론은 시발, 그 사이 교집합 아니, 합집합이라는 거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평론가들의 만장일치 호평이나 유수의 영화제들에서 받은 트로피만큼 '미치도록' 좋은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스테리한 존재인 '괴물'을 상정해놓고서도 실상 그 존재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고, 영화의 메시지도 단순하고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건, 델 토로라는 감독, 그 인격체가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면서도 연출이 정말 좋아서. 주인공이 버스 창을 통해 빗방울들의 춤사위를 보는 장면에선 죽을 뻔했다. 그 빗방울들을 본 이후로는 내가 현실세계에서 보는 빗방울들이 그 전과 달라보였다. 아니, 달라졌다. 더 이상 같을 수가 없었다. 가끔은, 요 며칠간 하늘에서 내려 집 창문에 바짝 붙어 고였던 빗방울들이 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만큼 연출이 좋고, 촬영이 좋고, 프로덕션 디자인이 좋다. 그리고 연기는 더 좋다. 샐리 호킨스의 연기는 마음 속에 길이 남을 것이고, 비록 동어반복의 느낌이 들지라도 마이클 셰넌과 옥타비아 스펜서 역시 좋다. 더그 존스는 더 좋다. 진짜 좋다. 그냥 그 괴물 같다. 갑자기 <해양 괴물>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본의 아니게 요즘 <염력> 이야기 많이 하는데, 그 영화는 장르와 주제의식이 잘 안 붙는 경우였다. 허나 <셰이프 오브 워터>는 정반대다. 장르와 주제의식이 어떻게 결합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모범사례 아니, 특급사례라 할 만하다. 상술했듯 메시지 자체는 조금 뻔하지만. 이 영화 속 악당은 '미래'에 어울리는 자동차를 타고 달린다. 그 초록색 차가 너무 멋지다는 부하 직원의 말에 그는 초록색이 아니라 청록색이라고 답한다. 초록색과 청록색은 크게 다를 것 없는 색이지만 그에게는 그 사소한 차이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그는 인종차별주의자고 성차별주의자이며, 종차별주의자다. 그에 맞서는 주인공의 연대는 각각 농아, 게이, 흑인 여성, 외국인 그리고 아예 다른 종(種)이며, 그들은 달력 뒷면의 '과거'를 상징한다. 맞다. 서로 다른 것들은 불균질해보일지는 몰라도 손을 잡고 연대하는 순간 향수 어린 치유의 힘을 갖는다. 최근 <블랙팬서>와 더불어, 트럼프 행정부에게 직언을 하는 그런 영화. 하지만 다 떠나서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엔딩 씬을 갖고 있던 영화.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집에서 언제나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주제곡을 듣는다.  

델 토로 감독이 현장에서 얼마나 신이 났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싸랑해요, 토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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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8/03/05 14:45 # 답글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들 보니 쟁쟁하더군요. 다들 힘을 주고 주제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한 영화들처럼 보였는데, 의외로 물흐르는 듯이 바라보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 감독상과 작품상을 주었으니... 역시 짬이 찬 감독이 좀 긴장을 풀고 느슨해지면 명작이 나오는 건가욬ㅋㅋ
  • CINEKOON 2018/03/06 13:24 #

    델 토로가 이번엔 여유를 좀 가졌던 것 같아요. 이 양반 여유 없이 빠짝 힘줘 찍으면 <판의 미로> 정도도 나오시는 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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