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1 14:29

퍼시픽 림, 2013 대여점 (구작)


예고편이 공개 되기 한참 이전 시점부터 이미 내 안의 소년이 끓어오르고 있었던 영화. 토토로 감독의 신작인 것만도 떨리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의 대결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라니. 이쯤 되면 거의 계 탔다고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어린 아이들 및 다 큰 어른들도 모두가 한 마음이었겠지. 하지만 인생, 그것은 비극. 정작 영화가 개봉 했을 즈음엔 남들보다 조금 늦은 입대로 인해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그냥 넘긴 영화기도 했다. 비록 보진 못했지만 무조건 좋은 영화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 하에 블루레이 구매. 그리고 다음 휴가 나가서 본 영화는......

본편 첫인상은 솔직히 말해 그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뭔가 대단한 영화를 보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토토로 감독 답게 일본 아니메와 괴수물들에 대한 오마주는 잔뜩이었지만 지나치게 선형적이고 전형적인 스토리라인과 다소 싱겁게까지 느껴지는 결말로 인해 여러모로 함량 미달이라고 느꼈던 영화다. 그렇게 실망 아닌 실망을 하고 부대 복귀.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전역 후, 블루레이 선반에 꽂혀 있는 이 영화를 다시 발견하곤 무엇에라도 홀린 듯 다시 보게 되는데......

세상에 이럴수가, 이렇게 멋진 영화가 또 없는 거다. 그 때 깨달았다. 아, 이 영화는 큰 화면으로 봐야 제 맛을 내는 영화구나. 아, 이 영화는 혼자 보거나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봐야 제 맛을 내는 영화구나. 때문에 가장 좋은 상영 환경은 개봉 당일 아이맥스관 조조 영화였을 것이다.

보고 나열할 수 있는 아니메나 영화가 수두룩 빽빽하다. 원조 괴수물이라 할 수 있는 <고지라>부터 시작해 <가메라>나 <모스라>가 생각나는 부분들도 있고, 거대 로봇으로 바꿔 말하자면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역시 안노 히데아키의 <에반게리온>. 왕년에 <에반게리온> 닳도록 보았던 게 이럴 때 또 도움이 된다. 짐 자무시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영화감독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한데 모아 이어붙이는 사람"이라는 그 말. 비록 짐 자무시가 한 말이긴 하지만 이 말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근래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감독들 중 델 토로만큼 진정한 영화감독인 사람이 또 없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던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그 인용. 최근작인 <셰이브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서도 분명 느꼈던 부분이렷다.

개인적으로 거대 로봇물도 좋아하지만, 거대 괴수에 좀 더 끌린다는 점에선 더 훌륭한 영화기도 하다. 등장하는 로봇 기체인 "예거"들은 체르노 알파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전형적으로 디자인된 반면, '카이주'들은 기존의 괴수 영화 속 괴수들보다 더 기괴하고 상징적이다. 역시 그로테스크한 괴물들의 장인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이다 싶은 부분들. 다만 영화 처음 볼 땐 그저 지구 어디선가 괴수들이 갑툭튀하는 설정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외계인들이 보낸 생물학적 병기였다는 점은 좀 김이 빠진다. 뭐랄까, 거대 괴수 특유의 신비로움이 좀 벗겨진달까. 요즘 레전더리에서 진행중인 몬스터버스 기획에 비해 좀 아쉬운 부분.

예거든 카이주든, 그 특유의 거대한 사이즈를 관객에게 소개하고 또 강조하는 방식의 연출이 재미있다. 난파 직전의 어선을 예거가 한 손으로 건져내는 장면이라든가, 해변에서 금속탐지기로 조그마한 물건들을 파헤치던 노인과 꼬마가 자욱한 안개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예거를 발견하는 장면이라든가... 하여간에 델 토로는 덕후들 마음을 안다니까. 당연히 본인도 덕후니까!

영화의 실질적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는 홍콩 야간 전투와 결말부 브리치 전투 장면이 밤에 펼쳐지거나 어두컴컴한 심해에서 펼쳐진다는 이유로 액션의 명확성이 부족하다며 조금 까이기도 하는 영화인데, 공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족한다. 솔직히 까고 말해서, 환한 대낮에 액션을 벌이는 로봇들은 <트랜스포머>에서 이미 많이 봤다. 물론 액션의 합이나 구체적인 동선이 명확히 보이면 좋지. 하지만 지금까지도 대낮의 <트랜스포머>보다 야밤의 <퍼시픽 림>을 돌려보는 이유는,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다. 다양한 색의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홍콩의 밤거리에서 펼쳐지는 대난투. 그 묘하게 사이버펑크스러운 분위기가 좋아서. 물론 그 때문에 결말부 브리치 전투 장면은 역시 실망스럽다. 이건 나도 인정.

전역하고 다시 보며 신나할 때만해도 속편이 곧 나올 줄 알았는데, 감독 갈리고 이렇게 늦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뱀발 - 이드리스 엘바가 진짜 멋지게 나오는 영화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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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8/03/21 16: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3/21 16: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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