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원작 애니메이션을 본 적은 있으나 너무 오래 전이라 사실상 안 본 것이나 다름 없다. 그나마 원작에 대해 갖고 있는 기분이라면, 그 원작 역시도 그리 인상적이었다거나 재밌지는 않았다는 점.
1.
류승완의 <베를린>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베를린>도 초반부와 중반부까지는 꽤 큰 그림을 그리는 듯해보이는 영화다. 북측 정보부와 남측 정보부는 물론이고 미국의 CIA, 심지어는 모사드 요원까지 등장하며 꽤 국제적인 이야기를 하니까.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그리는 듯 했던 그 영화는 정작 후반부에 가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아주 미시적인 이야기로 끝난다. 물론 개인적으로 <베를린>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여전히 있다. <인랑>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이 영화는 아예 오프닝에서 정우성의 내레이션으로 세계관을 대놓고 설명한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일본 등의 외세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남한과 북한의 통일 5개년 계획에 대한 설명도 나오고, 피의 금요일이니 뭐니 하여간에 무슨 고등학생 때 들여다보던 근현대사 교과서만큼이나 세세하게 별 이야기를 다한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중반부부터 그런 것들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베를린>도 그러지 않았냐고? <베를린>은 애초에 한 남자의 멜로라고 보는 편이다, 나는. 그래서 그게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 영화는 멜로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지 않나. 멜로가 나오긴 한다. 근데 그걸 또 잘했으면 몰라. 어쨌거나 오프닝에서부터 떠들어대던 '섹트'는 거대한 맥거핀에 불과했고, 공안부가 계획하고 있는 쿠데타의 구체적인 모양새나 목표는 자세히 전달되지 않는다. 이럴 거면 뭣하러 그런 설정들 하고 자빠졌냐.
2.
멜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영화 속 강동원과 한효주의 첫 키스는 확실히 갑작스럽다. 보다가 당황했다. 하지만 아주 이해 못할 부분은 또 아니다. 애초에 둘 다 인간적인 사랑의 감정으로 이끌려 키스를 한 것이 아니라, 에스피오나지 장르 속 주인공들마냥 서로를 이용해먹기 위해서 사랑에 빠진 것처럼 연기를 한 것이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타이밍도 너무 갑작스럽고,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해친다. 처음에 이거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기대했던 근미래의 이미지는 <블레이드 러너>의 그것마냥 너덜너덜하고 너저분한 느낌이었는데, 정작 강동원과 한효주의 데이트는 지나치게 쌔끈하고 뽀샤시 필터를 넣은 것마냥 아늑하고 따뜻하다. 둘이 국수 먹던 그 장면 아직도 기억난다. 찢어버리고 싶은 그 쇼트.
3.
총격 액션이나 프로텍트 기어를 활용한 액션은 좋지 않냐고들 하는데, 솔직히 전술 고증적으로 문제가 많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내가 군사전략에 조예가 아주 깊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밀덕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좀 조심스럽기는 한데, 나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보았을 때도 이 영화의 전술 고증이 한심하다는 뜻이니 그냥 넘어가자. 일단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광화문 장면. 테러단체 섹트는 방패와 최루탄으로 무장한 몇 백명의 무장경찰들을 상대해야한다. 하지만 섹트의 멤버는 세어봐도 열 명에서 스무 명 안 쪽. 개인화기로 무장했다 한들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니 그럼 적의 후방으로 숨어들어가 뒷치기를 하던지, 아니면 좀 다른 전략을 쓰던지. 결국 선택한다는 것이 닥돌이다. 그럼 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아, 저들이 원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어쩌면 대외적으로 무엇인가를 알리고 여론을 선동하기 위해서 아닐까? 그래서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닥돌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는 개뿔, 특기대 뜨니까 지하수로로 도망 가더라. 애초에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덤볐다는 거 아니냐, 그럼?
후반부에 또다시 반복되는 지하수로 시퀀스도 문제가 많은데, 공안부의 김무열 캐릭터는 예전에 특기대 소속이었다. 프로텍트 기어도 입어봤던 놈이란 말이다. 그럼 상식적으로 아이언맨이나 로보캅 마냥 일반 화기가 씨알도 안 먹히는 수트라는 걸 모를리 없을테다. 근데 자기 부하들을 양복 위에 방탄 조끼만 입힌채로 싸그리 내려보내나? 하긴, 초반엔 그럴 수 있다. 애초에 강동원과 한효주가 비무장 상태로 수로에 있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막상 가보니 정우성이 조달해준 프로텍트 기어를 강동원이 입고 있었던 거지. 그래, 처음엔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강동원이 프로텍트 기어를 입고 있단 것을 이제 아는데도 아무런 전략없이 그냥 또 닥돌. 벽에 폭탄 설치해 함정 만들기는 했는데, 폭탄 터지고 강동원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무전으로만 확인하고 앉아있다. 아니 폭탄이 터졌으면 일단 재빨리 가서 쓰러져있는 강동원을 조져놔야지. 이건 뭐 그냥 강동원이 폭사했기를 기도하고 있는 건가. 세월 좋네
4.
쓸데 없는 쇼트들이 대단히 많다. 나중에 GV 기회가 있다면 김지운 감독에게 가장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초반 카페 장면에서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초코라떼와 커피 직부감 쇼트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나는 그걸 따로 잡아주길래 뭐 대단히 중요한 정보가 든 쇼트인 줄 알고 초코라떼에 누가 독이라도 탔나 했잖아. 근데 시발 아무 것도 아니었어.
5.
영화의 아주 기본적인 완성도부터가 후진데, 첫 데이트 이후 시내버스를 태워 강동원을 보내는 한효주 장면. 거기서도 쇼트를 꽤 많이 나눴던데, 웃긴 것은 각 쇼트 마다 멀어지는 시내버스의 소리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거 음향편집 누가 했을까... 사실 음향편집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대사 역시도 문제다. 정우성과 강동원은 모두 발성이 깔끔하지 않은 배우들이다. 근데 음향마저 거지 같아서 묘한 하모니...
6.
불꽃카리스마 민호우는 미행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 같다. 골목에서 한효주와 한예리가 대화나눌 때 왜 굳이 검은 모자 쓰고 한 번 지나가냐. 시선을 한 번이라도 덜 받는 것이 미행에 유리하지 않나.
7.
기껏 잡아온 특기대 최정예를 의자에 앉혀놓고 테이프로 묶어두는 공안부 실화냐?
8.
김무열의 캐릭터는 설정 상 강동원에 대한 질투가 좀 있는 듯 하다. 마지막 유언조차도 '내가 너랑 다른 게 뭔데?!'라는 일갈이니. 하지만 그게 잘 안 느껴진다. 대체 얘는 왜 쟤한테 열폭하고 앉았냐.
9.
프로텍트 기어 디자인은 죽인다.
10.
근데 그 프로텍트 기어 입고 정우성과 강동원이 싸우는 후반부는 구리다.
결론.
김지운 감독의 전작에 나온 명대사를,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주고 싶다.
"말해봐요, 감독님. 이거 대체 왜 그랬어요?"
덧글
로그온티어 2018/07/30 14:24 # 답글
아니면 그냥 오십줄 넘겨서 호르몬 불균형이 와서 정신이 없는 것 (갱년기) 이거나, 밀정에서 온 정신을 쏟아버려서 정신력이 고갈된 상태로 블록버스터를 또 맡아서 그랬을 지도 (...)
CINEKOON 2018/07/31 15:56 #
CINEKOON 2018/07/31 15:56 #
로그온티어 2018/07/31 16:25 #
CINEKOON 2018/08/01 1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