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7 16:47

공작 극장전 (신작)


차갑고 건조한 에스피오나지 영화라길래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같은 걸 기대하고 봤다. 사실 내 잘못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걸? '차갑고 건조한 에스피오나지 영화'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그 누구라도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지, 안 그래? 왜 화를 내냐


열려라, 스포 천국!


하지만 정작 관람하고나니 당 영화는 한국적 감성이 든 에스피오나지 영화랄까. 전반적으로 차가운 건 맞는데, 그 중심에 좀 뭐랄까 뜨거운 부분이 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영화야말로 신파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인간적으로 뜨겁게 요동치는 핵심을 가진 영화라 해야겠지. 근데 재밌는 건, 평소라면 이런 부분을 엄청 싫어했을텐데, 이 영화에서는 그 부분이 이상하게도 좋게만 느껴지더라.

첩보계라는 차가운 직업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의 실상은 멜로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남녀 관계는 아니지만 결국엔 적진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남남 관계 속 뜨거운 의리 같은 것이 멜로 드라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그놈의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가 아니라, 알 파치노와 조니 뎁의 <도니 브래스코>였다. 이 영화 후반부 이성민의 리처장과 황정민의 흑금성 관계의 끝은 누가봐도 <도니 브래스코> 결말이거든. 물론 그 영화와는 달리 리처장이 나쁘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긴 한다만.

사소한 것으로 긴장감을 주면서도 끝내는 별 거 아니라는 듯 현실적으로 치워버리는 그 패기가 마음에 든다.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계단 위 못 하나로 한 시간 여의 긴 호흡으로 서스펜스를 유지했다면, 이 영화는 중간중간 자잘한 것들이 막 튀어나온다. 발목에 숨겨둔 녹음기나 팩스기를 분해 했다가 미처 제대로 숨기지 못했던 작은 공구 하나 등. 근데 재밌는 건 그 장면 넘어가면 그냥 끝이야. 더이상 그 소품들이 문제되거나 주인공의 발목을 붙잡는 일이 없다. 오히려 그게 현실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좀 다른 느낌. 전반부가 적국 속으로 침투하는 스파이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후반부는 <1987><택시 운전사> 등이 그래왔듯 한국의 근현대사를 꿰뚫는 느낌. 묘하게 재밌긴 하다. 에스피오나지, 첩보라는 게 애초에 적국 또는 상대국으로 침투하는 이야기잖아. 근데 이 영화는 적국에 침투하긴 하는데, 결국엔 조국이 주인공의 걸림돌이 되고 심지어는 주인공이 조국을 분쇄하기에 이른다. 참 재밌는 나라고 재밌는 관계란 말이지, 남한과 북한은.

그래서 보는 동안 그런 생각도 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전 대통령 탄핵과 촛불 시위 등의 국면이 시작되면서 이야기의 중심추가 다소 옮겨간 것은 아닐까. 그 때문에 영화가 더 차가워지기 보다는 조금 뜨거워진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그럼 뭐 어때. 영화가 이렇게 괜찮은 걸. 그리고 그 혼란스런 와중에 흑금성이 모종의 선택을 했다는 것이 좋았다. 후에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혼란스러운 와중 끝내 어떤 '선택'을 했다는 그 사실. 그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실이 미묘하게 감동이었다.

결말은 여전히 좀 과하다고 생각한다. 다소 느끼한 거지. 시계랑 넥타이핀 과시하는 것쯤이야 귀여운 장난으로 치부해줄 수 있는데 둘이 서로를 향해서 큰 걸음으로 걸어가는 건 좀 오버라고 느껴져서. 하지만 계속 이야기하는 건데 뭐 어때. 영화가 이 정도로 재밌으면 된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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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8/08/27 17:03 # 답글

    ...그 놈의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 트렌드 2018/08/27 19:09 # 삭제 답글

    한참 조폭 미화 영화들이 줄줄이 나왔었죠.
    요즘은 다른걸 미화하는 영화들이 줄줄이 나오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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