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먼 옛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도 기술이 있다고. 그리고 그 기술은 크게 세가지로 이루어진다고. 첫번째는 로고스. 누가 들어도 납득할만한 실질적 논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두번째는 파토스. 듣는 이를 공감하게 하고, 심지어는 감동까지 하게 만드는 감정적인 부분.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여겼던 게 바로 에토스다. 간단히 말하면, 말하는 화자의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 그 화자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행실을 보여왔는가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렵다는 것. 아니, 어려울 수 밖에 없지. 로고스랑 파토스는 그 때 그 때 닥치는대로 준비해서 내면 그만인데, 에토스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과정을 보는 거잖아. 막말로 이런 거다.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박근혜와 유재석이 한다면? 두 화자 사이의 갭이 너무 크긴 하지만, 어쨌거나 빡 이해된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고하니... <곰돌이 푸 - 다시 만나 행복해>가 던지는 메시지는 대단히 감정적이기 때문에 굉장한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 좀 교과서 같은 멘트를 직접적으로 던지는 영화라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해야하나. 생각해보자. 90년대 스타일의 한국 뮤직비디오에서 주인공이 우수에 찬 눈빛으로 상대를 보며, '난 언제나 여기서 널 기다려왔어'라고 말을 한다면. aㅏ... 벌써 산낙지마냥 몸이 꼼지락대는 게... 하여간 영화가 로고스는 좀 떨어지고 파토스는 많이 과한데, 에토스가 그걸 다 커버 해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곰돌이 푸의 입을 빌어 그런 대사들을 하면 하나도 안 민망하고 오히려 감동이 배가된다니까! 이런 교훈계의 사기캐를 봤나.
기획을 잘 잡기도 했다. 어린 크리스토퍼 로빈을 주인공 삼아 인형 친구들과 벌이는 모험을 주된 이야기로 삼지 않고, 그 시점으로부터 2,30년 간격을 잡아 성인이 된 크리스토퍼 로빈을 주인공으로 만든 것. 2차 세계대전도 겪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회사 생활도 겪고 있는 남자로 나오는데 이게 여간 공감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 크리스토퍼 로빈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심지어 얼굴이 오비완 케노비야. 거기서 게임 셋.
푸와 친구들의 리디자인이 잘 되어 있다. 원작의 그 생김새를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지만, 보푸라기 일어있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들을 좋아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이니... 그 외의 인간 캐릭터들도 비교적 캐스팅이 명확하고 다들 밥값을 잘 하고 있다. 헤일리 앳웰은 페기 카터가 아닌 역할로 만나 반갑기도 하고.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마음이 가고 가장 불쌍한 건 크리스토퍼 로빈의 이웃집 사내. 비싸게도 구네 카드 게임 한 번 좀 쳐주지!
다만 결말부가 지나치게 도식적이며 감정과잉처럼 보인다. 물론 이해는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연말용 디즈니 가족 영화인데, 그 정도의 결말은 이해해 줘야지. 하지만 교훈계의 만능 치트키 푸 선생이 참여 했을지라도 이 영화 결말부 크리스토퍼 로빈 일당들의 가방 회사 레이드 장면은... 여기서는 나던 눈물도 좀 쏙 들어가는 경향이 있더라고.
뭐, 자그마한 불만 몇 가지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미지 하나가 너무 강력했다. 풍선을 들고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은 미련 곰탱이의 뒷모습. 그리고 나를 보며 하는 말. '나는 여기서 언제나 너를 기다려왔어.' 아-,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이 이미지 한 방의 힘이 너무 셌다.
덧글
로그온티어 2018/10/09 19:16 # 답글
CINEKOON 2018/10/14 13:56 #
로그온티어 2018/10/14 19:01 #
뻘 덧글을 달 수 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