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9 14:53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극장전 (신작)


우리가 일일 연속극을 욕하면서도 보는 이유는 말도 안 되고, 불필요하고, 오버스러운 설정과 연출이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전통적이며 자극적인 맛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보다 후자가 큰 거고, 그렇다고 전자가 아예 거슬리지 않는 것은 또 아니니까 보되 욕하면서 보는 거지.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전통적이며 자극적인 맛은 지키되, 말도 안 되고 불필요하면서 오버스럽기까지한 부분들을 세련된 연출로 포장해 최소화 시키면 어떨까? 이 영화는 그 기획의 모범사례다.


크레이지 리치 스포일러!


이야기의 전형성은 사실 더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냥 뻔함. 물론 북미 관객들의 기준에서 보자면 나름 신선한 이야기였을지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양인이라는 것 외에도 일단 시월드vs며늘아가 이야기와 <꽃보다 남자> 식의 대부호 로맨스가 그들에겐 신선해 보였을지도 모르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봤던 미국 영화들에서 우리네 TV 연속극 같은 부분들은 크게 없었거든. 어쨌거나 그래서 북미를 강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거.

하여간에 겁나 리치한 집안의 예비 며느리로 집안 경사에 초대받아 던전 레이드 뛰듯이 예비남편 일가 멤버들을 각개격파한다는 스토리는 두 말 할 것 없이 뻔하다. 하지만 뻔하다는 건 다른 의미로 잘 먹힌단 소리거든. 애초에 연출을 더럽게 못하지 않은 이상 재미 없을 수가 없는 게 신데렐라 스토리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구준표 나왔던 <꽃보다 남자>도 시청률 잘 나왔던 막장의 나라잖아. 그 드라마도 그렇게 인기를 끌었는데, 이 영화가 더 못할 것은 없다고 본다.

근데 씨발 연출이 다 했다. 뭐 그렇다고해서 대단한 연출이 널려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본적인 연출을 잘 했고 중간중간 센스있게 세련된 부분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게 이 영화 전체를 살렸다. 막장 드라마 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오버스러움을 싹 다 걷어내고 그 자리를 온전히 세련된 연출로 채운거다. 그게 생각보다 크고, 그래서 이 영화가 먹힌다.

재밌는 건, 이 영화의 오프닝이다.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어렸던 시절로 돌아가, 양자경이 연기한 엘레노어 영이 백인 소프트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불이익을 당하는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근데 영화 중반부부터 후반부까지, 과거에 그리 무시받았던 엘레노어는 자신만의 또다른 잣대를 세워 주인공인 레이첼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불이익을 준다. 대를 잇거나 넘은 것도 아니라, 그냥 그 세대 안에서 바뀌어버린 무시무시한 악순환. 하긴, 엘레노어가 무조건적으로 레이첼을 몰아붙였다고만은 볼 수 없는 게 약간의 게임을 제안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 무협 영화에서 스승이 몰래 카메라로 제자 훈련하듯이, 과연 너가 우리 집안을 다시 세울 인재인지 지켜보겠다-라는 식의 게임이랄까. 물론 그렇다고해서 대놓고 레이첼의 뒷조사를 했던 게 용서되진 않겠지만.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으레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을 충족시켜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중요한 데이트를 앞두고 주인공이 친구와 함께 쇼핑하며 드레스를 고르는 몽타주 장면이 언제쯤 나올까 싶었는데 어김없이 나오더라. 근데 클리셰라고 매도하며 깔 수도 있었는데, 영화가 진작에 스스로 커밍아웃하며 밝히더라. 주인공 친구인 아콰피나의 입을 통해. "나 이런 거 언젠간 꼭 해보고 싶었는데!"라고 하면서. 그쯤 되니 욕하기가 싫어졌다. 그래, 솔직해지자. 이런 거 구경하려고 보는 장르잖아. 영화 스스로가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이 영화가 북미 지역에서 일으켰던 돌풍에 대해선 크게 할 말이 없다. <블랙팬서> 때도 그랬고.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인종을 떠나서 그냥 존나게 재밌고 귀여운 영화라는 것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좌석에서 일어서는데 기분이 좋았다. 결말부에 치달아 그런 기분을 만들 수 있는 영화는 흔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 중반부에 나오는 결혼식 장면. 얕은 심도, 주인공의 클로즈업 쇼트,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can`t help falling in love'. 조심히 말하자면 여기서 살짝 울었다. 슬픈 게 아니라 너무 행복해서. 주인공을 응원해주고 싶어서. 아니,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때때로 이런 장면을 목도하기 위해 우리가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때때로 어떤 영화들의 어떤 장면들은 장르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나한텐 그 장면이 그랬다.

뱀발 1 - 양자경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파워풀하다.
뱀발 2 - 버나드 역할 배우 어디서 많이 봤다 했는데 <패트리어트 데이>의 그 동양인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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