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4 12:42

창궐 극장전 (신작)


나는 뜨거웠던 우리들의 지난 촛불 혁명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촛불의 뜨거움을 저열하게 팔아 먹으려한 한 장르 영화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그렇다. 이것은 <창궐> 이야기다. <창궐>은 좀비 장르 영화의 틀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현빈의 촌스러운 내레이션을 통해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다’ 따위의 유치한 대사를 내뱉는다. 그리고 펼쳐지는 횃불 든 성난 민중들의 모습. 이것은 몇 해 전 광화문을 중심으로 뜨겁게 펼쳐졌던 촛불들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저열한 방식이다. 촛불 혁명을 메타포끼워 팔고 싶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과 그 옆의 캐릭터들은 모두 민중 그 자체를 상징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청나라로 떠났다가 돌아온 왕의 아들, 즉 세자이고 그는 종국에 이르러 모두를 구한다. 매우 ‘영웅적인’ 방식으로. 촛불 혁명에 민중까지 끼워 팔아먹고 싶었다면 최소한 중간 중간에라도 민중들의 이야기와 그 모습들을 보여 주었어야지. 하지만 이 영화의 민중들은 모두 이 세계관의 좀비를 지칭하는 말인 ‘야귀’로 변해 산 자들을 공격한다. 애초에 좀비 장르는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 장르다. 우매한 민중들의 모습과 더불어 목적만을 좇는 맹렬한 비익명성까지도 보여주는 장르니까. 조지 로메로가 이 장르를 개국한 이후, 잭 스나이더가 <새벽의 저주>로 신세기를 열어젖힌지도 10년이 훌쩍 넘어가건만, <창궐>은 왜 이 장르가 사랑받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장르 영화인 것이다. 그냥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보니까, 이런 게 요즘 먹히니까 가져다가 썼다. 그리고 유명한 배우들 주르륵 캐스팅. 그렇다고 장르 영화가 꼭 오락성만을 좇아야 한다는 것은 또 아니다. 장르 영화도 충분히 메타포를 가질 수 있다. <새벽의 저주> 속 주인공들은 몰려드는 좀비 떼를 피해 동네 대형 쇼핑 마트로 숨어들고, 마트 내에 있는 다양한 도구들로 생존을 모색한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메타포요, 영화를 보는 관객들 소비심리를 영민하게 꿰뚫은 재밌는 설정이다. 우리가 한 번쯤 해봤던 상상, 세상이 무법천지가 되고 감시자들이 사라져서 마트 안의 모든 물건들을 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하지만 그 메타포를 떼도 이 설정은 충분히 말이 된다. 좀비 떼가 창궐하면 당연히 다양한 도구들과 많은 식량들이 필요하잖아. 장르 영화는 이렇게, 충분히 메타포를 잘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창궐>의 그것은 매우 직접적이라 유치하다. 좀비 장르의 엄청난 애호가는 아니지만, 특정 장르를 이렇게도 저열하게 이용하는 영화들을 보면 화가 난다. 갑자기 그거 떠오르네. <7광구> 기자 시사회에서 감독이 ‘사실 전 괴수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떠들어댔던 거. 이 영화의 감독은 어떤지 모르겠다.

핑백

  • DID U MISS ME ? : 할로윈 2018-11-10 14:50:17 #

    ... 는데. 결국 봤는데. 결과론적으로는 그 모든 게 다 추억팔이빨 거품 아니었나 싶다. 모든 스포일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뜬금없지만 &lt;블랙 팬서&gt;와 &lt;창궐&gt; 때 했던 비판 지점과 겹치는 부분이 크다. 수퍼히어로 장르든, 좀비 호러 장르든 메시지를 넣는 것 자체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실제로 그 장르의 걸작들 ... more

덧글

  • 남중생 2018/11/04 16:24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저열한 베껴쓰기라고 생각하고, 메타포를 훨씬 잘 녹여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이 글에서 지적하신 저열함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또한가지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중심리에 빌붙어보려고 어줍잖게 만든 사극에는, 대중심리에 영합하는 적당히 핑계좋은 역사관이 깃들기 좋다는 점입니다.
    청나라에서 돌아왔다가 (벼루맞아) 그 원대한 잠재력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가 주역이고... 백성 없이는 왕은 없지만, 다시 말해 백성 배불려주는 왕은 얼마든지 웰컴인 유쾌한 민주주의가 씁쓸하네요.
  • CINEKOON 2018/11/10 00:09 #

    백성 배불려주는 왕이야말로 훌륭한 전제군주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걸 넣을 것이었다면 뒷부분의 촛불집회 메타포는 깔끔하게 빼는 게 어땠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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