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3 15:33

국가부도의 날 극장전 (신작)


이 영화를 보며 아담 맥케이의 <빅 쇼트>를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전체적인 컨셉과 이야기 구조는 물론 특정 캐릭터의 디테일까지도 유사하니까. 다만 <빅 쇼트>가 심각한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경공술하듯 발랄한 기운을 잃지 않는 블랙 코미디였던 데에 반해, <국가부도의 날>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가라앉아있다. 근데 사실 표절이든 단순 카피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내가 <국가부도의 날> 연출권을 손에 쥔 감독이었어도 <빅 쇼트>를 레퍼런스로 삼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했을 테니까.


스포일러의 날!


유아인이 연기한 캐릭터에서 <빅 쇼트>의 기운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그의 캐릭터는 <빅 쇼트>의 크리스쳔 베일과 라이언 고슬링을 살짝 섞고 그 영화에서의 브래드 피트로 데코레이션 한 느낌이거든. 위기 직전의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빨리 그 낌새를 알아채고 기회를 잡는 사나이. 그러면서도 일말의 동정심을 가진 사나이. 문제는 너무 많은 캐릭터성을 뒤섞다보니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에 밝으나 최소한 사람다워보였던 그는, 영화가 후반부에 들어서자 스위치 하나 눌러 불 켜지고 꺼지듯 캐릭터가 뒤바뀐다. 돈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돈 벌어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그는 후반부에 들어서 갑자기 소리를 꽥꽥 지르는 위선자가 된다. 그러면서 또 막판에 씁쓸해하는 건 또 뭐야. 오락가락도 아니고.

김혜수는 뛰어난 연기력과 매력을 지닌 배우지만 가끔 각본가와 연출가들이 그를 과신하는 듯 하다. 아무리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의 김혜수라 할지라도 카메라 쪽으로 눈을 부릅뜨며 "이제부터는 우리가 시스템이야" 따위의 대사를 한다면 관객 입자에서는 부담스럽고 다소 오그라들 수 밖에 없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반면에 조우진. 역시 연기는 뛰어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조악한 악역이다. 허나 중후반부에 나오는 시차드립 대사에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별 거 아닌, 그저 지나가는 유머성 대사일 뿐이지만 그 한마디로 이 캐릭터를 대번에 소개하는 찰진 대사. 조우진한테는 이런 대사 진상해놓고 왜 김혜수한테는 그런 대사 던져줬을까. 그거야말로 그 배우를 너무 과신한 게 아닐까.

김혜수와 유아인이 각자의 스토리라인을 이끌며 위기와 기회를 저울질 하는 사이, 영화의 감정적인 멜로 드라마 및 가족 드라마는 모두 허진호에게 부여된다. 그래, 솔직히 울었다. 박카스를 건네받는 그 모습에. 이 정도의 신파라면 환영이다. 아니, 이런 건 신파라고 할 수 없는 거지. 그냥 감정적인 장면인 거지. 그것도 굉장히 성공적인. 물론 한국은행 소속 금융위기관리 팀장인 김혜수 캐릭터나 셈법에 밝은 유아인 캐릭터 보다야 관객들 입장에선 허준호에게 많이 감정 이입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근데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워낙 연기가 좋고 묵직해서 영화를 보는 맛이 난다.

문제는 영화가 때때로 부족하고, 또 때때로 넘친다는 것. 연출적으로의 아쉬움이 조금씩 크게 느껴지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제는 그저 종잇장에 불과한 어음을 만지작 거리며 허준호가 거리를 배회할 때, 카메라는 클로즈업과 바스트샷으로 인물의 흔들리는 감정을 가만히, 때로는 격렬하게 응시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다만 이 똑같은 거리를 영화의 후반부에서 유아인이 걷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도 똑같이 연출했더라. 인물의 얼굴 위주로 타이트하게 잡는 쇼트 사이즈.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최소한 한 번이라도 좀 와이드한 쇼트 사이즈, 예컨대 롱 쇼트 같은 걸 하나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회는 시스템이고, 우리는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구성원이다.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이 막대한 부를 얻었을지라도, 그 구성원이 속한 '사회'라는 시스템이 망가진다면, 그 구성원 역시도 편하게 살 수만은 없다. 혼자 백만장자에 좋은 저택 지어 살면 뭐해, 주변 편의점 망하고 마트 망하고 재래시장 망하면 어디서 컵라면 살 건데? 물론 이렇게 막 던진 질문에 진지 잡순채 '부자들이 그런다고 못 살 것 같아?'라고 일갈한다면 할 말 없지만, 최소한 타인의 피해가 온전히 타인만의 것은 아님을 이 영화가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유아인이 거리를 걷는 그 장면에서 와이드한 쇼트를 펼침으로써 폐업한 여러 가게들, 그래서 불이 꺼진 거리 한 가운데에 유아인이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이후 이어지는 유아인의 씁쓸한 표정이 좀 더 와닿지 않았을까. 지금 버전은 내내 유아인 얼굴만 화면 가득 보여주는데 혼자 키득거리다가 갑자기 씁쓸해하니 '대체 쟤 왜 저래?'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에필로그도 좀 깬다. 통째로 날려버렸으면 하는 부분. 더불어 무슨 <러브 액츄얼리>도 아니고 김혜수랑 허준호가 남매사이였다는 반전 아닌 반전이 꼭 필요했나. 그 자체로 아무 기능도 못하는데. 이것 저것 바꾸고 좀 삭제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긴한데 뭐 내가 감독도 아니고. 그냥 이 정도로 불만 토로하는 선에서 정리해본다.

뱀발 - 뱅상 카셀의 아우라는 범접하기 어려워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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