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9 16:14

모털 엔진 극장전 (신작)


영화 속에서 자꾸 되풀이 되는 대사. "과거의 비극을 잊었어요?"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주된 실질적 모티프인지도 모르지.


스포엔진!


다른 게 아니라 과거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상황과 꽤 많이 겹쳐져 보이는 영화라서 그렇다. 거대 엔진을 장착하고 드라이브하는 도시 국가의 이미지가 쌈박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인구가 과밀화된 거대 도시 국가가 작은 중소규모의 도시 국가들을 사냥하곤 그것으로부터 자원을 채취하는 이미지.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일자리를 주고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감언이설을 내뱉지만 사회 곳곳에서 그런 인간들을 노예로 거래하는 게 일상화된 이미지. 그리고 그런 싸움과 살육들을 오락삼아 즐기는 사람들의 이미지. 심지어 이 무자비한 거대 도시 국가는 신 판게아 상태라곤 하지만 어찌되었든 유럽에서 아시아의 방향으로 향하고, 이에 반하는 조직은 중국과 티베트 고원 등지의 모습을 적절히 짬뽕한 것만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며 대다수가 아프리카 인종이나 아시아 인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그 무자비한 거대 도시 국가가 대영제국기를 휘날리는 런던이란 것에서 화룡점정.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요소들을 일정 부분 차용한 점도 재미있는데,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무기의 이름은 '메두사'. 신화 속 메두사가 짤짤이 데미지 일절 없이 오직 눈깔빔 한 방으로 큼직큼직하게 상대하는 타입이었던지라 영화 속 해당 무기도 한 방 한 방이 강력한 보라빔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헤스터의 죽은 모친 이름은 '판도라'. 그녀가 죽기 전 발견한 메두사 모듈은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죽기 전 '헤스터'라는 희망을 남겼으니 이 역시도 여러모로 신화 속 그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거다.

그런 맥락들을 읽는 것이 재미있으나, 사실 이 영화가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설정과 그 설정을 뒷받침해주는 훌륭한 프로덕션 디자인에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프로덕션 디자인한 담당자 상은 못 줘도 최소 인센티브는 더 받아야 한다. 물론 여기저기서 다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게 사실이긴 하나, 그럼에도 보는내내 감탄을 하는 부분들이 많았으니. 특히 런던의 다층적인 레이어 구성은 정말이지 눈에 띌 정도로 인상 깊더라.

그럼에도 좀 중구난방인 경향이 큰데, 일단 걱정했던 것보단 전반적으로 즐겁게 보았으나 곁가지들이 너무 흐름을 망친다. 대표적인 게 슈라이크 스토리 아크와 캐서린 스토리 아크. 이 둘은 영화에서 죄다 파내도 하등 아무 상관이 없다. 슈라이크는 올해 최강의 스토커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 강렬한 이미지와 의도치 않게 비웃음을 사는 몇몇 동작 등의 잔재미를 제외하면 없는 게 더 깔끔했을 거다. 캐서린 스토리 아크 역시 마찬가지. 런던 내부에서도 비극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컨셉으로 가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일단 캐릭터 자체의 물리적 비중이 별로 없을 뿐더러 매력도 없음. 이 둘 없애고 그냥 헤스터를 위주로해 굵직한 스토리 한 방으로만 갔었다면 훨씬 괜찮았을 것. 아, 후반부 급등장한 발렌타인의 헤스터 친부 설정도. 사실 중초반부터 암시되기 때문에 큰 반전이라고 볼 수도 없는데다가, 그게 밝혀지는 순간에 딱히 기능하는 게 없다. 너무 훅-하고 지나갈 뿐더러 그거 듣고도 헤스터 별다른 쇼크 안 당하던데.

생각보다 괜찮았던 영화다. 재밌었다. 하지만 보는내내 너무 길단 생각을 했다. 그러다 제작자인 피터 잭슨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더라고. '아, 이 양반 본인이 제작한 영화에서도 스스로의 고질병을 못 고쳤네. 이거 한 두 시간 사십분은 되는 영화인가.' 싶었는데 다 끝나고 나와 런닝타임을 확인하니 에게게. 딱 두 시간짜리 영화였잖아? 실제 런닝타임보다 체감 지속 시간이 더 길었다는 게 영화에게 있어선 꽤 치명타일 거다. 하여간에 줄거리 정리 좀 하지... 피터 잭슨 사단에게 런닝타임 30분 덜기 운동을 처방합니다.

뱀발 - 우주 최강의 스토커 슈라이크는 스티븐 랭이 연기했네. 왜 그리 무시무시했는지 알 것만 같다.

핑백

  • DID U MISS ME ? : 킹콩, 2005 2019-11-21 17:49:03 #

    ... 해골섬으로 가기까지가 한 시간 정도, 해골섬에서의 모험이 또 한 시간을 좀 넘고, 마지막 뉴욕에서의 대난장 파티와 비극적 결말이 나머지 한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요즘엔 피터 잭슨이 연출하거나 제작하는 모든 영화들에 런닝타임을 30분 정도씩만 덜어 보게끔 처방 내리고 싶어지지만, 이 때만 해도 피터 잭슨은 그 긴 런닝타임을 늘 ... more

  • DID U MISS ME ? : 2018년 영화 결산 2019-12-26 02:39:30 #

    ... 타인 / 할로윈 / 동네 사람들 / 보헤미안 랩소디 /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 툴리 / 국가부도의 날 / 도어락 /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 / 모털 엔진 / 헌터 킬러 / 모글리 - 정글의 전설 /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 카우보이의 노래 / 로마 / 스윙키즈 / 마약왕 / 아쿠아맨 / 크리스마스 연대 ... more

  • DID U MISS ME ? :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1977 2020-01-03 15:13:16 #

    ... 죽음의 별에서 탈출하는 과정이 또 30분. 그러다보니 반란 연합에서 미션 브리핑하고 실제로 죽음의 별 터뜨리는 것 다 합치면 20분이 채 안 됨. 아마 요즘의 블록버스터 영화 구성이라면 좀 힘들었을 짜임새다. 근데 이 영화를 기점으로 이후 시리즈에서는 다 이런 구성을 취함. <제국의 역습>도 호스 행성과 그 전투 장 ... more

덧글

  • 포스21 2018/12/09 17:17 # 답글

    흠, 소설을 재밌게 본터라... 챙겨볼 영화이긴 한데 , 날씨가 너무 추워서 보러가기 힘드네요.
  • CINEKOON 2018/12/10 20:23 #

    소설은 어떤가요
  • 포스21 2018/12/11 08:02 # 답글

    소설은 뭐 꽤 재밌었습니다. 청소년용 모험소설에 약간에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가 섞인 소프트 SF죠. 결말은 좀 허무하달까? 약간은 도교적인 결말이었습니다.
  • CINEKOON 2018/12/18 14:23 #

    피터 잭슨 이 양반 그거 다 시리즈하고 감독판까지 내고 싶어했을 것 같은데...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