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9 16:32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2018 대여점 (구작)


부끄럽지만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거대 규모의 상업 장편 영화를 하고 있는 것은 또 아니고, 그냥 소소하게 단편이든 중편이든 만들고 있다.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고, 졸업을 한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도 이 일을 놓지 않고 있어 자뻑이지만 가끔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하다. 물론 아직 한참 모자란 실력이지만, 그럼에도 수십편의 영화 촬영 현장을 경험하다보니 이것저것 많은 추억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러던 중에 마주한 이 영화. 아, 이 영화에 그런 추억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들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충분 하게는 들어 있었다. 영화 만들기의 고단함, 그 애수! 그렇게 힘든데도 영화를 놓지 못하는 그 처량한 사랑스러움. 그게 이 영화의 본질이었다.


스포가 그리 크진 않지만 반드시 본 영화를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엄근진)


듣던 소문대로, 과연 초반 30여분은 엉망진창이더라. 근데 이런 B급 영화에 이젠 나름 단련이 되어 있어서 인지, 그렇게까지 나쁘다는 느낌은 없던데. 오히려 꽤 전위적이라고 느끼기까지 했으니까. 한 쇼트로 30여분을 끌어가는 롱테이크 진기명기. 근데 그게 깔끔 하지도 않고 오히려 지저분하고 거친 느낌이 들어 더 마음에 들었던 진기명기.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초반 30분을 은행 적금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초반 30분을 잘 버텨야 후반 1시간동안 즐거울 수 있다고 해서. 하지만 난 그 초반 30분 마저도 재미있게 봤다. 특히 극 중 영화 감독 역할을 하는 인물의 불타오르는 예술혼 드립은 진짜 찰지더라. 반쯤 미쳐서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개그가 내 스타일인데 그거에 딱 부합함.

하여튼 재밌지만 누더기 같은 완성도의 초반 30분 극 중 극이 끝나면,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다. 말도 안 되는 기획으로 영화 제작을 밀어붙이는 방송국놈들과 제작 및 기획자들. 여기에 생계를 위해,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뛰어든 감독. 영화는 이 감독 캐릭터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그 주위에 있는 배우와 스텝들의 존재를 잊지 않는다. 

영화과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로부터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현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니, 아무리 준비를 해도 분명 현장에선 무언가가 벌어지기 마련이니 애초에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는 기대를 접는 것이 좋다'라고. 나보다 더 현장에서 오래 구른 선배 세대에게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내가 겪었던 현장들이 실제로 그랬다.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변두리 공원의 무료 스케이트장을 빌려놨는데 정작 촬영 당일 카메라를 짊어지고 가보니 다음 날 무슨 전국 스케이트 보드 대회라도 있는 건지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는 스케이터와 보더들을 만난 적이 있다. 정말 조그마한 규모의 촬영이라 별 걱정 없이 한산한 골목을 점찍어 두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괴팍한 노인 때문에 세상천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진귀한 쌍욕들을 주워 먹기도 했고. 기상청의 일기 예보를 믿고 사실 온전히 믿었다기 보단 간절히 믿고 싶었다 촬영을 진행했다가 비나 눈이 오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며, 기껏 촬영 잘 끝내놨는데 동기녹음 담당의 실수로 영화의 오디오 정보가 통째로 날아간 동기놈의 촬영장 에피소드도 있었다. 세상만사 어떤 일이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유독 촬영장에선 그게 심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감독 또는 스텝으로서, 모든 촬영은 항상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힘들고 고단하고 배고픈데도 왜 계속해서 우린 영화를 찍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 영화를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극 중에서 그런 부분이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요통으로 촬영감독이 쓰러지자, 그 옆을 따라다니던 촬영부원이 카메라를 대신 잡는다. 애초 기획 단계부터 촬영감독은 그 촬영부원에게 카메라를 맡길 용의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사전 제작 단계에서 그 촬영부원이 줌 인/줌 아웃을 쓰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내자 촌스럽다며 저지한게 촬영감독이었다. 하지만 촬영감독은 쓰러지고, 그 촬영부원은 카메라의 바통을 넘겨 받는다. 그리고 해방이라도 된 듯 분출하는 줌 인 앤 아웃. 그걸 보던 누군가가 외친다. "촌스럽지만 아주 멋져!" 줌 인 앤 아웃을 쏴대던 그 촬영부원의 모습은 진심으로 신이 나 보이고 행복해 보였다. 근데 그러다가 자빠진다. 근데 그 자빠진 걸, 옆에 있던 배우가 일으켜세우고 도와준다. 아, 난 영화 만들기의 정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던 걸 하는 쾌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얻어낸 행운 같은 쇼트, 그리고 모두가 함께 하고 있다는 그 기쁨.

영화가 코미디로써도 불순물 없이 순도가 아주 높은 편이고, 배우들의 연기와 더불어 얼굴 면면도 아주 마음에 든다. 사실 이 영화가 마냥 재미있는 영화이기만 했다면 이토록 마음에 오래 남지는 못했을 텐데, 아주 페이소스를 한 사발 갖다 부었더라. 제작자와 연출자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나 권력 구조 등의 영화 현장 상황을 잘 옮기기도 했고. 그리고 뭣보다도, 가족 드라마로써 아주 잘 기능하는 영화다. 마지막 딸이 주인공에게 사진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행복하게 오열할 뻔 했다.

쓰다보니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그냥 개인 뻘글이 된 것 같네. 두서 없이 썼지만 영화인으로서 정말 행복한 영화였다. 아, 나는 정말로 영화가 마법이라고 생각한다. 애처롭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영화는 그런 마법이다.



덧글

  • 로그온티어 2019/01/09 18:56 # 답글

    아 영화만드시는 분이셨구나...;;
    얼마전에도 이글루스에서 다른 분 (영화업계 종사자, 시나리오 작가) 본 것 같은데 꽤 이글루스에 상주해 계시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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