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0 18:25

언브레이커블, 2000 대여점 (구작)


세상에 수퍼히어로를 현실적으로 다룬 영화들은 많았다. 리차드 도너가 낭만주의 색채를 바르고 영화라는 매체로 이 장르를 개국한 이래, 80년대는 표현주의의 대가인 팀 버튼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후 시간이 흘러 사실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대부분의 수퍼히어로 영화들은 부분적으로 낭만or표현or초현실주의적인 묘사를 두르긴 했으나 언제나 그 본질은 사실주의로 일관 했었지. 그리고 그런 태도가 극에 달아 터져버린 게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영화들과 조쉬 트랭크의 <크로니클> 같은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언브레이커블>이 존재했으니......

영화의 결말은 존나 희극과 비극의 쌍쌍파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자 강철 신체의 소유자인 데이빗 던 입장에서야 수퍼히어로로서의 아이덴티티 각성이 일어나고 여러 연쇄 테러의 진범까지 찾아냈으니 나름의 해피 엔딩이지. 무엇보다 아들과의 관계도 개선되었고. 다만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엘라이자 프라이스 입장에서 이 결말을 보자면, 좀 난감하다. 결국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범죄 행각들이 들통 나면서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으니 그 자체로만 보면 악당으로서 불행한 최후겠지만, 어찌보면 수퍼히어로로서 데이빗 던을 만들고 각성 시킨 것 또한 그의 계획이니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는 여정에서 목적 달성은 또 한 셈. 따지고 보면 그 비극적인 최후와 희극적인 목적 달성이 서로 연계되어있다는 게 더 무섭다. 사실상 자신 목적의 화룡점정을 위해 스스로 자수한 것이나 다름 없거든. 방송에서 이경규가 '멍청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라고 여러번 말했었는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이 영화 속 엘라이자처럼 '오타쿠가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야말로 덕질의 끝에서 스스로가 원해 맞이한 최후.

샤말란의 전성기 시절 제작된 작품 답게 그의 테이스트가 곳곳에서 뿜어져 나온다. 초현실적인 사건에 접근해가며 불안에 떠는 인물들과 그를 잘 담아내는 카메라. 특히 촬영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진짜 많은 작품이기도 한데, 그 특유의 불안감을 촬영 하나만으로도 잘 캐치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수퍼히어로 장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업 영화에서 잘 쓰지 않는 촬영과 연출을 대담하게 해낸다. 대표적인 건 역시 주인공과 그 아내가 벌이는 대화 씬이겠지. 일반적인 영화라면 OTS 셋업으로 최소 두 방향은 찍을 것을 이 장면에서 샤말란은 한 쇼트로만 담아낸다. 때문에 3분여에 달하는 긴 대화 장면 동안 우리는 브루스 윌리스의 뒷통수만 보게 되는데, 그럼에도 영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더라. 이건 그냥 연출을 잘한거다.

원작의 그것과는 달라 골수팬들은 싫어하는 설정이지만, 팀 버튼이 영화에서 정립한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를 좋아한다. 배트맨과 조커, 이 둘이 서로가 서로를 만들었다는 그 설정. 물론 막무가내로 이 설정이 최고라는 건 아니다. 브루스 웨인 부모 살해 사건의 진범으로 조 칠이 제시되는 원작의 그것이 더 좋긴 하지. 다만 그 둘의 '맛'이 다르며, 그 두 맛 모두 좋아한다는 거다. 수퍼히어로와 수퍼빌런이 단순히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만드는데에 깊게 관여 했다는 그 설정. 뭔가 교묘하게 그리스 비극 같지 않나. 근데 <언브레이커블>이 그걸 아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빛나는 순간에 사무엘 L 잭슨의 화룡점정 같은 연기가 있다. 자기 삶의 이유를 찾아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한 동시에 더욱 더 그에 강하게 귀속된 그 아이러니 같은 순간의 연기. 좋으면서 좆같을 것 같은 그 짠내나는 순간. 우리의 머더뻐커 형님이 그 순간을 결코 놓칠리 없지.

핑백

  • DID U MISS ME ? : 글래스 2019-01-20 18:45:48 #

    ... 영화가 개봉하고, 또 그로부터 두 달 뒤에는 어떤 영화가 개봉합니다- 뭐 이런 식. 근데 샤말란의 이 수퍼히어로 연작은 그야말로 희대의 갑툭튀였다. 아니, &lt;언브레이커블&gt; 슬슬 잊혀질 무렵에 &lt;23 아이덴티티&gt; 결말부로 뒷통수 후리더니 2년 만에 완결작으로 돌아올 줄이야. 역시 사람일, 영화일은 모를 일이다 ... more

  • DID U MISS ME ? : 닥터 슬립 2019-11-12 21:30:17 #

    ... 유니버스로 한데 묶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획인데. 하여튼 &lt;캐리&gt; 뿐만 아니라 같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샤말란의 &lt;언브레이커블&gt;에서 &lt;글래스&gt;로 마무리되는 그 3부작이 떠오르기도 했음. 능력자 배틀물이라는 점에서는 그 시리즈와도 어떻게 엮어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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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01/20 19:28 # 답글

    평범한 순간들에 비현실적인 것이 조용히 감겨 오는데, 정신차려보면 어느샌가 비현실이 현실이 되고 기존의 현실이 비현실이 되어버립니다. 샤말란 작품보면... 절대 저런 일이 없을 건데, 저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요. 자기 특유의 현실감각으로 점칠된 셈이지만 설득력과 감성표현력이 진짜 풍부해서, 스크린으로 소환된 현실에 빠져들게 됩니다. 보고 나면, 어딘가 슈퍼히어로가 있을 지 모른다는 믿음조차 새록새록 생겨나게 됩니다.

    저는 계속 저걸 보면서 이게 왜 그런 느낌이 날까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테크닉이 있었군요. 언젠가 촬영기법과 연출에 대한 깊은 글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샤말란은 주로 이런 장기를 가지고 스릴러나 호러를 그려내곤 했는데, [언브레이커블]이 유일하게 호러free한 작품이네요 (...) 아, 에어벤더요? 그건 기억 안 납니다. 그런 작품이 있었군요.
  • CINEKOON 2019/01/28 13:56 #

    샤말란 영화들은 은근히 사실주의적이라 소름이 끼쳐요. 그 불안함을 가중시키는 스멀스멀한 분위기도...
  • CINEKOON 2019/01/28 13:57 #

    에어밴더 뭐시기라는 영화가 생각 안 나시면 애프터 어스 뭐시기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 로그온티어 2019/01/28 22:37 #

    음. 전 그 두 작품을 모릅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피해야 할 것 같군요. 근데 샤말란이 실수할 리가 없지! VOD를 찾자! 설마 더 비지트보다 낮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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