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번 밝힌 것 같지만, 난 누가봐도 완성도가 처참할 것만 같은 영화들을 극장에서 보는 악취미가 있다. 뭐랄까... 좀 놀리면서 보는 재미? '에이, 영화 나도 만들겠다!'를 연발하며 보는 즐거움? 그리고 보통 이런 류의 영화들은 상영관 내에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나 혼자서 비웃으며 보기에 적합하거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진짜 악취미네. 하여튼 나의 악취미 레이더에 걸려든 새로운 타게트가 바로 이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되시겠다.
영화 외적으로 넷상에선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일단은 엄복동 자전거 도둑 논란은 빼고 이야기하련다. 그런 논란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어쨌거나 영화이니까. 그리고 그런 논란을 제외하고도 워낙 깔 게 많으니깐.
민족적 스포츠 스타였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독립운동가들과는 일절 관련이 없었던 엄복동을 일종의 독립 투사처럼 묘사했다는 역사 왜곡 논란도 있는데, 사실 이건 좀 중요한 부분이다. 역사 왜곡 자체의 논란도 논란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런 묘사를 빼고 했어야 영화적으로도 더 재밌을 수 있는 영화였거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삼아 만든 스포츠 영화이기만 했다면 훨씬 더 재밌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YMCA 야구단>이 그랬던 것처럼. 시대적 배경이 주는 기본적 힘이 있고, 거기에다 한일전을 다루기만 한다면야 사실 애국심 억지로 짜내 강요하지 않아도 애국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그냥 엄복동의 스포츠 스타적인 면모만 부각시켰어도 영화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텐데, 영화는 끝내 엄복동을 독립투사로서 신화화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크게 두 줄기로 진행되는데, 첫째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엄복동이 자전차 선수로서 상장하는 것이고 둘째는 독립투사들의 항일 운동기다. 근데 앞서 말했듯 이 두 개가 잘 안 붙는다. 하나만 해도 모자랄 판국에 전혀 다른 이야기 두 개를 억지로 붙이려하니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자전거 마냥 덜컹 거린다.
생각보다 초반 빌드업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아쉬움이 더 진하게 드러나는데, 물론 이 영화의 초반부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망작이라 치부될 정도로 최악은 또 아니란 거다. 뻔하고 전형적인 건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스포츠 영화로써의 길만 묵묵히 걸어갔다면 나름대로 평타는 칠 수 있었을텐데.
실존 인물이 어쨌든 간에 이 영화 속 주인공인 엄복동은 그야말로 단순한 인물이다. 그냥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헤헤- 거리며 순수함을 노골적으로 어필하는데, 정작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꼴리는대로만 진행. 자전차 사고 싶으면 자전차 사게 되고, 집 떠나고 싶으면 집 떠나게 되고, 자전차 선수하고 싶으면 선수하게 되고... 참으로 편리한 인생이다.
주인공 엄복동 뿐만 아니라 그 주위 인물들도 모두 개판. 이범수의 캐릭터는 뜬금없는 타이밍에 뜬금없는 표정으로 뜬금없게 등장하는 뜬금없는 재주를 갖고 있다. 영화가 또 꼴에 하고픈 건 많아서 중간에 초창기 <분노의 질주> 마냥 불법 레이싱 경주 장면 같은 것도 있는데, 대체 이범수는 거기서 왜 나온 겨... 더불어 이시언이 연기한 캐릭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결국 개그 감초 캐릭터. 근데 한 번도 안 웃긴 게 개그. 강소라의 캐릭터는 <암살>의 포스트 전지현이 되고 싶었던 건가- 정도에서 그치고, 뜬금없이 기관총 난사하는 고창석의 캐릭터는 안쓰럽다. 아니, 근데 진짜로 웃긴 겤ㅋㅋㅋㅋㅋㅋ 고창석은 강소라와 기습작전 모의해놓고 정작 본인은 스스로가 그토록 싫어했던 자전차 경주 보다가 작전에 지각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런 게 의도된 개그라면 명 개그다. 그건 그거고... 그나저나 엄복동 남동생은 왜 나온 걸까. 심지어 이 남동생이 죽은 거 아무도 모름.
악역들도 개판인데, 얼마 전 <증인>에서의 좋은 연기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박근형은 여기서 그 강한 인상을 다 까먹는 이상한 일본어 연기를. 여기에 끝판왕 자전차 선수로 등장한 정석원은... <쉰들러 리스트>의 랄프 파인즈가 잠깐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저 캐릭터적인 유사성 때문이고, 그냥 혼자 너무 만화적이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살아남은 건 김희원 정도. 악역을 너무 많이 해서 질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딴 거 없더라. 그냥 존재 자체가 멋짐.
영화에서 가장 웃긴 건 역시 결말부다. 사람 힘으로 자전차를 그리 높게 던지는 것도 실로 어이가 털리는 명장면인데, 이후 전개되는 양상은... 엄복동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민초들과 그들이 부르는 애국가 완창. 이 정도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거기서 뜬금없이 애국가가 왜 나와. 심지어 더 대단한 건, 엄복동의 표정이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뛰어나온 거 아니냐? 그럼 그들이 일제의 총칼에 죽어나갈 때 다들 피하라고 소리를 지르던가, 아니면 최소한 미안한 표정 정도는 지어줘야 주인공이지. 여기 주인공이란 작자는 자기 지켜주려고 나온 사람들이 총 맞아 죽어나가도 그냥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음. 아......
이걸 <항거 - 유관순 이야기>와 같은 날 연이어 본 게 재미있다. 그 영화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으며 이성적으로 접근했었는데, 이 영화는 그런 전략 하나 없이 그냥 강요+강요+강요. 그 강요에 결국 눈물로써 굴복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별로 슬프지도 않았다는 게... 이거면 이거대로 대단한 영화라 할만하겠다.
덧글
잠본이 2019/03/05 04:32 # 답글
타마 2019/03/05 09:00 # 답글
뇌빠는사람 2019/03/05 16:25 #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