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 한참 전에 영화 포스터 관련해서 이슈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메인 포스터를 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슈. 포스터의 구도나 인물 배치, 배색 등은 물론이거니와 다루고 있는 소재 역시 비슷한 점이 있었기에 좀 난리였었지. 뭐, 그게 표절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 여기에서 구구절절 논할 것은 아니고. 하여튼 그런 이슈도 있었고, 소재적인 측면에서의 공통성도 있어보여서 난 이 영화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한국적으로 카피한 영화일 거라 생각했었다. JK 필름이 잘 하는 거 있잖아. 예전 할리우드 영화들 베껴다가 한국적으로 이식하는 거. <네고시에이터>와 <협상>의 관계, <포레스트 검프>와 <국제시장>의 관계, <스피드>와 <퀵>의 관계 같은 게, 바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돈>의 관계는 아닐까 생각했었다. 물론 <돈>이 JK 필름의 작품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영화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다른 구성의 영화더라.
제목도 '돈'이고, 내레이션으로 류준열이 내내 부자가 되고 싶었다는 타령을 하니 난 이 영화도 성공과 몰락의 이야기일 줄 알았다. 류준열이 연기하는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증권 브로커로서 온갖 추잡한 짓들을 다 하다가 끝내는 단죄 받는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던 거지. 한 마디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주인공이 월가의 늑대였던 것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도 여의도의 늑대일 줄 알았다. 근데 알고보니 여의도의 늑대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 늑대를 잡는 이야기였다는 게 함정.
그러니까 쉽게 말해 전형적인 한국형 범죄 영화란 거다. 증권 브로커라는 생소한 직업군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있는 드라마가 아니라, 결국 또 갖은 트릭과 묘수로 네임드급 지능형 범죄자를 검거하는 이야기였다는 것. 그래도 갈피가 잘 안 잡힌다면 그냥 <꾼> 같은 영화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심지어 배우가 한 명 겹친다 그 배우의 캐릭터도 겹친다
초짜 증권 브로커로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초반부 모습은 좀 오버하면 <미생>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회 초년생으로 입사해 상사의 쿠사리와 회식 문화를 모조리 겪으며 감내하는 그런 부분이 좀 있거든. 그러다가 실수도 좀 하고, 성공도 좀 하고. 사실 좀 큰 성공이지. 어쨌든 그 성공의 부스러기로 큰 집으로 이사하거나 명품 쇼핑을 하거나 하는 등의 장면은 확실히 매력있다. 좀 뻔한 묘사이긴 해도, 어쨌거나 그런 걸로 대리만족 좀 하면 좋잖아.
근데 여기서도 지능형 흑막 캐릭터로 나오는 유지태의 '번호표'가 개입되면서는 또 범죄 영화의 길로 빠진다.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갑자기 현실감 급락. 물론 그런 금융 범죄들이나 자살 당할 수도 있다는 식의 공포스러운 묘사는 현실에서부터 기인한 것이긴 하지마는 어쨌거나 초반부에 비하면 아주 와닿지도 않는 이야기들인지라. 갑자기 좀 소격효과가 발생하는 느낌?
소격효과 이야기 나온 김에. 영화에서 좀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바하마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실제 로케이션으로 촬영을 진행한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갑자기 손흥민 선수가 나온다. 아, 직접 출연하는 건 아니고 그가 선수로서 뛰는 경기를 주인공이 TV 중계로 보고 있다는 내용. 근데 그게 좀 뜬금없다. 게다가 류준열과 손흥민은 실제로 꽤 친한 사이고, 그게 또 많이 기사화 되었었잖아. 그러다보니 갑자기 주인공이 '조일현'으로 안 보이고 '류준열'로 보이게 되더라. 여기에 한국에서 작품 활동이 뜸한 다니엘 헤니까지 깜짝 출연을 해버리니, 이건 내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MBC <나 혼자 산다> 바하마 특집을 보고 있는 건지 좀 아리송해질 정도.
그 완성도와는 별개로, <뺑반>에서의 류준열은 분명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엔 없다. 그냥 조용히 묻어간다는 느낌. 유지태의 활용법은 <꾼>이나 <사바하>에 비하면 좀 나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올드보이>의 캐릭터 복사본 같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주인공한테 뒷통수 맞고 패배하는 지능형 흑막 빌런 전문 배우가 아닌가 싶을 지경. 조우진은 일명 '사냥개'로 불리면서 한 번 잡은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는 캐릭터로 묘사되는데, 정작 활약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옆집 애완견 같은 느낌이다. 막 죽이려고 달려드는 느낌이 아니라 귀찮게 휘젓고 다니는 느낌. 적당히 좀 해라-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좋아. 다 양보해서... 전형적인 한국형 범죄 영화로 가는 거 괜찮아. 그럼 이제 주인공이 각종 묘수를 통해 악당을 물리치는 걸 보여주며 카타르시스 한 번 제대로 자극해야지? 근데 이 영화의 그 묘수라는 게... 딱 두 가지다. 돈 뿌리기 광역 스킬이랑 대화 녹음 신공. 근데 둘 다 너무 뻔하고 재미없지 않냐...? 애초 회사 면접 때 주인공이 코스피 지수 다 통으로 외워버린 천재 돌아이 캐릭터라며... 그럼 더 신선하고 똑부러지는 트릭을 준비했었어야지, 이제와서 뭐? 라이터 위장 녹음기...? 심지어 그거 초반에 다 대놓고 보여주잖아.. 이 정도면 복선이 아니라 그냥 설명이잖아... 때문에 결말부까지 보고나면 내가 유지태의 심정이 되어버린다. '이런 개 잡놈한테 이런 허접한 방식으로 당하다니 분하다...'하고.
생각해보니 주인공은 어쨌든 금융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놈인데 단죄 받지도 않고 끝나네. 그냥 튀면 만사 오케이. 서울 지하철 참 좋다. 공권력도 따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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