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이드리스 엘바의 저 포스터 속 표정 그거 단 하나 때문에 보게 된 미니 시리즈. 지금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섭렵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주요작품들은 거진 다 봤는데, 저렇게 뭔가 덜 떨어진 웃음을 짓고 있는 건 처음 봤다. 딱 그거 하나 때문에 본 시리즈.
그리고 실제로 이드리스 엘바는 이 미니 시리즈의 알파이자 오메가요, 빛과 소금이다. 정통 코미디 배우로 알려진 사람이 타이틀 롤을 맡았더라면 이런 느낌이 안 났을텐데, 각종 영화에서 험상궃은 표정으로 카리스마 뿜뿜하던 양반 데려다가 이런 거 시키니 꽤 맛이 난다. 배우 본인도 스스로 그걸 즐기고 있는 것 같고.
이드리스 엘바의 '찰리'는 왕년에 '찰리 에이요'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DJ인데, 진짜 말그대로 왕년 밖에 없는 사내다. 딱 하나의 히트곡으로 사랑 받았던 왕년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도 언더그라운드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만 보고 있는 사내. 하지만 정작 현실은 시궁창이다. 이모 집에서 얹혀사는데 저멀리 나이지리아에 계시는 부모님은 계속 스카이프로 연락해 달달 볶지, 전 여자친구는 나보다 잘난 놈 만나 약혼했지, 영감은 안 떠오르고 그나마 들어오는 일들도 죄다 B급 아닌 C급 정도의 행사들일 뿐. 여기에 오랜만에 만난 불알친구는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배우로 런던에 돌아온다. 이 정도면 자괴감 폭발할 텐션 아니냐.
근데 주인공이 그 감정적 갈피를 좀 잘 잡는다. 원래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너무 비참하게만 나가면 지루한데다 우울해지고, 그렇다고 또 너무 밝게만 나가면 현실감각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거든. 그 와중에 이드리스 엘바의 찰리가 중심을 잘 잡는다. 상황 자체는 비참하되, 배우의 표정과 대사가 밝다. 너무 느끼하지도, 너무 매콤하지도 않는 중후한 구성.
사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다섯번째 에피소드에 있다. 음악적 동료가 된 세라에게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는 장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음악계의 거물이 된 줄 아셔. 돈도 많이 버는 줄 아시고, 헤어진 전 여자친구와는 여전히 잘 되어가고 있는 줄 아시지. 근근히 번 돈을 정기적으로 부모님께 부치고 있어. 다 새로 번 돈인 줄 아시지. 하지만 아니야- 로 이어지는 대화. 이거 너무 비릿할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이드리스 엘바의 표정이 너무 삼삼해서 느끼하지 않더라. 기분 좋은 비참함이라고 해아할까.
아, 이런 주인공 캐릭터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나. 가끔 멍청한 짓도 하고, 스스로가 통제 안 되어 실수도 저지르고, 또 거만해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내 모습이 보이더라. 뭔가 잘 해보고 싶은데, 너무 잘 안 되니까 스스로에게 만족 못하는 그런 거 있잖아. 정말 능력있는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다고 했을 때, 너무 좋지만 또 그 손을 선뜻 잡기가 미안해지는 그런 순간들 있잖아. 거기에 너무 내 모습이 녹아있는 것 같아 좀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더라.
존나 막장으로 빠질 수도 있는 이야기였는데 적당한 긴장감만 주면서 실제론 그 길을 안 갔다는 것도 좋다. 그리고 다 떠나서 이드리스 엘바 겁나 섹시하네. 지금까지 목소리에만 빠져 있었는데 역시 몸도 연기도 다 좋은 양반이었어.
클리프행어 아닌 클리프행어로 시즌 피날레한지라 얼른 다음 시즌 나왔으면 좋겠다. 일 끝나고 집에 왔을 때 배경소음으로 틀어놓기도 딱 좋은 미니 시리즈다. 넷플릭스야, 얼른 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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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온티어 2019/03/30 14:21 #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