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 나이트> 삼부작과 <로건>을 좋아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했었다.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이면서도 스스로 그걸 숨기고 부정하는 분위기의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두 시리즈 뿐만이 아니라, 그걸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태도가 어쩔 수 없이 얄밉기도 했다.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걸 숨기면 숨길수록, 전통적인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걸 더 좋게 보는 시선들.
그것에 비해 <샤잠!>이 솔직한 영화라는 것은 큰 장점이다. 수퍼히어로 장르라는게 애초에 뭔가. 아직 철이 덜 들어 마음 한 켠에 어린 과거의 자신을 남몰래 숨겨두고 있는 어른들을 위한 장르 아닌가? 한없이 평범하기만 하던 내가, 특출난 능력을 얻게 되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게 이 장르의 본질적인 판타지 아니냐- 이 말이야.
캐릭터의 존재나 설정 등은 원작 코믹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걸 다 모르는 상태로 본다해도 꽤 신선한 설정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듯 하다. 빡친 백만장자 부자가 주인공인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구 밖에서 온 외계종자이거나 왜 하는지 모를 과학실험의 뻔한 사고를 통해 수퍼히어로가 된 인물들이 나오는 영화도 아니잖아. 일단 주인공이 14살 소년인 것부터가 굉장히 신선하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딴 거 다 필요없고 샤잠이라고 외치기만 하면 수퍼히어로로 각정한다는 설정도 깔끔하고.
게다가 그 어린 주인공을 제대로 써먹는 설정이 바로 이 영화의 위탁 가족 설정이다. 솔직히 이 정도면 잘 엮었다고 본다.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여야만 가족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온전히 줄 수 있는 곳이 집이고 또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힘이 생겼을 때 그 힘을 나눌 줄 알아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 이 모든 게 다른 영화적 설정과 찰떡처럼 들어맞는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좀 더 많은 영화이기는 함.
우선, 배우들 간의 조율 문제가 있다. 주인공인 빌리 뱃슨은 2인 1역이 필요한 역할이다. 본체라고 할 수 있을 어린 배우와, 샤잠이라는 수퍼히어로로 각성했을 때를 연기해줄 성인 배우가 한 명씩 필요하니까. 근데 아주 당연한 문제인데 그 둘 사이의 연기 조율이 안 되어 있다는 느낌. 애시당초 빌리 뱃슨은 애늙은이 캐릭터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지고 여러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살아온, 그야말로 시니컬한 어린 아이다. 근데 얘가 빨간 쫄쫄이를 입기만 하면 오두방정에 지랄발광. 물론 안다. 제아무리 철이 일찍 든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그 본질은 어린 아이이기에 큰 힘을 가졌을 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현실이 아니라 영화잖아. 그럼 최소한의 것을 해줘야지. 막말로 이 영화 초반의 빌리 뱃슨의 모습과 샤잠이 되어 오두방정 댄스를 추는 모습은 전혀 매치가 안 된다.
수퍼히어로 장르에서 우리가 응당 기대하는 것들은 액션과 스펙터클의 규모일진대, 그 부분에서도 <샤잠!>은 실망스럽다. 아니, 액션의 규모가 크지 않은 것은 괜찮아.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액션 시퀀스들이 모두 단조롭고, 그마저도 다 비슷하게 디자인 되어 있다. 제일 큰 문제는 <맨 오브 스틸>과 비슷하다는 것. 물론 규모나 연출은 <맨 오브 스틸>이 훨씬 낫지. 내 말은 그런 거다. 수퍼맨이나 샤잠이나 능력이 비슷하지 않나. 그러다보니 액션 설계와 컨셉이 겹친다. 그냥 비행 가능한 수퍼히어로와 수퍼빌런이 대도시의 마천수 사이를 날아다니며 서로 줘패는 광경. 그 자체로도 별써 기시감이 진한데다 어쨌거나 전부 CG잖아. 질량감 없는 CG 액션은 좀 빠르게 물리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더불어 이 영화에서 기대했던 지점은 특유의 병맛미. <데드풀>이 병맛 코드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성인 취향의 개드립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거든. 그에 반해 <샤잠!>은 진짜 B급 코드 병맛을 이룩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예고편이 워낙 잘 나왔었으니까. 근데 그게 아니더라. 물론 중반 샤잠이 자신의 수퍼히어로 능력을 테스트하는 몽타주 시퀀스가 재밌긴 하지만, 그런 연출이 영화 전체에 고루 뿌려져 있질 않다. 메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냥 특급 양념으로만 소비하다가 그친 느낌. 사실 액션의 스펙터클이 작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이건 좀 해줬어야지.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특유의 유치함 아니었을까. 의미 자체는 좋았지만 후반부 샤잠 패밀리의 액션 시퀀스는... 그야말로 충공깽. 누군가는 파워레인저를 떠올렸다고도 하던데 실제로 그렇다. 아니, 근데 그 유치함은 분명 잡을 수 있는 유치함이었다. 설정 자체가 유치하긴 하니까 샤잠 패밀리가 등장한 직후와 초반엔 어쩔 수 없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액션 설계를 좀 세련되게 했다면 분명 평가가 조금이나마 나아졌을거라 생각한다. 아니, 어쨌든 일개 수퍼히어로 한 명이 아니라 패밀리인데 그럼 팀업 무비잖아. 각 팀원들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그들끼리의 연계 팀워크를 보여줬어야했다. 근데 그런 거 1도 없음. 그러면서 걱정이 더해지는 건, 세계관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겠다는 걱정. 샤잠 패밀리 뜨면 저스티스 리그는 다 핫바지 되는 거다. 적어도 플래시는 벌써 핫바지 확정이지. 심지어 이 영화 엔딩 크레딧 시퀀스에서 다른 리거들 희화화도 시키던데...
악역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얘도 몸만 어른이지 결국 정신 상태는 애정결핍 걸린 애거든. 애랑 애가 싸우는 내용이다 보니 그게 좀 재밌는데, 캐스팅이 한없이 진지한 표정의 소유자 마크 스트롱이라 더 재밌음. 배우 망가뜨리는 맛이 있다. 그나저나 리들리 스콧의 <로빈 후드>에서 진짜 멋있었는데, 이 양반...
결론. 꽤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 영화였는데, 그 기대치에는 한없이 못미친 거 맞다. 다만 그런 말은 해주고 싶다. <샤잠!>은 이 장르에서 제일 유치하고, 또 제일 솔직한 영화라고. 유치한 게 아쉽긴 했지만, 그럼에도 솔직한 게 좋았다. 근데 이거 속편은 어떻게 찍냐. 애들은 진짜 쑥쑥 크잖아. 월드 프리미어 레드 카펫 사진 보니까 그새 벌써 컸던데.
덧글
ㅁㅁㅁㅁ 2019/04/10 15:41 # 삭제 답글
그 갭을 메워보려는 시도는 있었지요.
메리가 대학진학을 두고 고민할 때
냉정해져라, 니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야지 왜 위탁가정 같은 굴레에
얽메이는데?
라는 멘트는 그냥 아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이죠. 적어도 달라같은 정많은 아이라면요.
그 부분이 빌리가 샤잠이 되어 잃어버린 소년기를
만끽하면서도 그 그늘이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거라고 봅니다. 그래도
많이 모자라긴 합니다만...
CINEKOON 2019/04/10 16:25 #
대표적인 건 록키가 팔 뻗고 있던 자리에서 펼쳐지는 수퍼파워 버스킹 같은 거요. 물론 아직 어린 아이니까 수퍼파워 갖고 놀고도 싶고, 과시 하고도 싶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아는 빌리라면 그냥 하늘을 날아 다녔거나 저공비행 정도로 그쳤을 것 같아요. 근데 얘는 여기서 아이 오브 타이거 반주에 맞춰 번개 쾅쾅하며 돈 벌고 있잖아요. 심지어 얼마 전엔 ATM도 털었던 애가 이렇게 과시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게... -ㅅ-
그나마 ㅁㅁㅁㅁ님이 말씀해주신 부분이 있어 다행이긴 했지요. 그것마저 없었으면 정말 어쩔뻔 했어요.
RNarsis 2019/04/10 16:49 # 답글
CINEKOON 2019/04/19 17:30 #
역사관심 2019/04/10 20:06 # 답글
CINEKOON 2019/04/19 1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