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3 17:32

프로포즈, 2009 대여점 (구작)


만들기 어려운 장르엔 뭐가 있을까? 당장 떠오르는 건 SF나 판타지, 전쟁 영화 정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자본력과 기술력만 적당히 갖춰주면 그 이후부터는 술술 풀릴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럼 호러? 호러 역시 클리셰와 신선한 아이디어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 중요해 만들기 쉽지 않은 장르인 것은 맞다. 하지만 호러 장르는 팬층이 두텁되 넓진 못하다. 때문에 만들기 가장 어려운 장르라는 타이틀의 주인은 의외로 로맨틱 코미디 차지일 것이다. 호러를 싫어하고 안 보는 사람들은 많지만, 로맨틱 코미디는 선호도를 떠나 그냥 보게 된다.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TV 케이블 채널 돌리다가 몇 번 봤을 것이고, 하다못해 데이트 나가서 자신의 연인과 함께 억지로 본 적 역시 있을 것이다. 장르의 공식 역시 많이 퍼져있는 상태. 

더불어 로맨틱 코미디엔 별 바리에이션이 없다. 호러야 귀신이든 좀비든 괴수든 적당한 서브 장르를 하나 골라잡아 끌어가면 되는 것인데, 로맨틱 코미디엔 별 선택지가 없다. 남/녀 또는 남/남 또는 여/여의 주인공 설정만 끝내면 이후부터는 다 비슷하게 된다. 둘 중 누가 더 부자인 설정이라든가 하는 것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연애라는 것은 '만남-연애-이별'의 순서를 거치지 않나. 

그렇기에 결국 감성적으로 호소할 수 밖에 없는 장르다. 근데 이 영화는 그게 영 떨어진다. 일단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본다. 사기 결혼. 뭐, 이것도 흔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럼에도 재밌게 풀어나갈 여지가 큰 소재다. 비자 갱신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행정적인 이유 때문에 행하는 사기 결혼이라니. 

하지만 영화는 그 이후부터 나태 해진다. 별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남자 주인공의 집안이 시골 마을의 부잣집이었다는 설정을 해놓고도 그걸로 인해 촉발되는 갈등이나 사건이 없으며, 심지어 별 묘사도 없다. 한마디로 써먹질 않으니 영 쓸데없는 설정이다. 가장 중요한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도 흐지부지에다가 클리셰 투성이고, 그렇다고해서 그게 또 솔직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중간에 몇 번 나오는 코미디 장면은 그 질이 낮고 별 재미가 없다. 아니, 그리고 무엇보다 그 코미디를 하려고 갑자기 만든 설정이나 장면이 많다니까. 막말로 남자 주인공의 할머니는 왜 갑자기 인디언 추장 마냥 자연숭배 캠프파이어 하고 있는 건데? 그런 거 하시는 분이라는 별 묘사도 없었잖아. 이거 그냥 순전히 산드라 블록 엉덩이 댄스하게 만들려고 한 장면 아니냐고.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느끼는 감정은 일견 이해가 되지만,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해가 안 간다는 것도 문제.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처럼 인물들의 연애 감정을 다루는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게 그거 아니냐? 두 인물의 감정선과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 같은 것들을 공감 시켜줘야 하는 거잖아. 근데 영화가 그걸 기본적으로 대충하고 넘기려 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작살나는 영화도 아니고, 음악으로 조지는 영화도 아님. 개봉 당시 북미에서 꽤 크게 성공했던 걸로 아는데 내 취향이 대중과 괴리된 건지 아니면 그냥 얻어걸린 성공이었던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네. 이거 본다고 새벽 다섯시까지 넷플릭스 앞에서 알짱대던 내 자신이 존나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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