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 두고 여혐과 남혐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얽히고 섥혀 싸우고 있던데 그런 것들 다 배제하고 보면 그냥 못 만든 영화일 뿐이다. 근데 시바 또 이상한 부분에서 끌리는 영화이기도 하고.
채찍 때리기 전에 당근부터 좀 주자면, 이 영화의 괴랄한 유머 코드가 나랑 좀 잘 맞아서 좋았다. 물론 여성을 주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를 다루고 또 그걸 수사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를 썼단 점에서 어느정도 진지한 영화인건 맞는데, 그래도 어쨌거나 '코믹 수사극' 정도로 홍보하고 있으니 그냥 말하겠다. 이 영화의 유머 코드들은 대개 B급에서 기인하는데, 내가 그런 걸 좀 좋아해? 그러다보니 이 영화의 유머들 중 노골적으로 B급인 부분들에서 맘에 드는 게 꽤 있었다. 주인공 콤비에게 덤비는 범죄자 무리들 중 졸개 한 명이 야구 방망이나 쇠파이프가 아닌 바리깡 들고 돌격 때린다는 점, 그리고 그 놈 잡들이 할 때 그 바리깡으로 그 놈 머리 가운데 고속도로 내버리는 묘사 같은 것들. 아니면 몰카범의 주머니와 가슴팍에서 디지털 카메라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장면 같은 것들. 그러니까, 현실적인 코미디가 아닌 말그대로 비현실적인 B급 코미디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장면들이 좋았다는 거다. 이거 외에도 몇 개 더 있는데, <열혈사제>로 눈도장 쾅쾅 찍었던 안창환이 중딩 킥보드 뜯으면서 하는 대사갸 제일 백미. 보통의 악당이라면 '비켜!' 정도의 대사를 가볍게 쳤을텐데, 여기서 안창환은 아주 근엄한 말투와 목소리로 '나와!'를 시전한다. 아... 이렇게 글로만 써놓고 보면 진짜 하나도 안 웃기네. 이건 진짜 직접 봐야 아는 톤인 거다. 또 카메오로 등장하는 안재홍의 '유단자야?' 대사도 좋고.
후반부 민원실 옥상에서 염혜란이 라미란 갈구다가 응원하게 되는 장면. 이건 좀 오그라들고 전형적인 장면 같아 싫었는데, 여기서 또 재밌는게 카메라가 갑자기 와이드하게 확 빠진다. 레쓰비 CF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이것도 의도였다면 잘한 거다. 난 이런 개그 좋던데.
문제는 딱 거기까지라는 것.
상술했듯이 여성을 주 대상으로하는 디지털 성범죄가 메인인 영화인지라 매우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그걸 잘 살렸는지는 의문. 일단 피해 여성들의 고충이나 상처 같은 것들을 보듬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약자로 다루며 동정의 시선으로만 보는 게 좀 아쉽다. 근데 애초 그걸 떠나 그냥 만듦새가 조악하더라. 막말로 피해 여성이 민원실 들어오는 장면에서 이후 전개 다 예상 되던데. 자살 시도할 것도 뻔하고, 심지어 그 여자를 받아버리는 자동차가 하얀색 용달 트럭인 것도 뻔함. 더불어 그 피해 여성이 등장한 뒤 바로 민원실로 들어오는 남자 무리는 뭔데? 아니,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경찰서 민원실 들어오면서 소리 빽빽 지르고 하이파이브 하냐고.. 여기 공공장소잖아... 그것도 경찰서에 딸린 공공장소...
여성 영화로써 남자 캐릭터들을 모두 멍청하게 다루는 부분. 뭐, 이런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다만 더 큰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걸 잘 못 살린 것 같아 아쉬운 것들은 많음. 대표적인 아쉬움은 역시 윤상현 캐릭터일 거다. 아... 지금 버전은 그냥 유치하고 멍청한 캐릭터지만, 이거 분명히 더 잘 살릴 수 있었을 거라고 본다. 항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 중심에 의도치 않게 서 있던 캐릭터. 그래서 불행한 동시에 도움이 되는 캐릭터 정도로 B급 스럽게 뽑아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설정상 주인공 콤비가 웃음을 담당하고, 이 영화에서 악의 무리로 묘사되는 남자 범죄자들이 무섭게 느껴졌어야만 했다. 근데 이 영화는 반대던데. 오히려 악의 무리들이 더 웃겼음. 악의 무리 리더가 약 빨 때 마다 짓는 표정은 너무 지나쳐서 오그라들었고, 그 옆에서 마약 제조하는 아이비리그 출신 섹시남은...... 일단 캐릭터 자체도 뻔한데 영어 발음이 일품이다. 시종일관 '빡!' 소리 지르길래 영화 다보고 같이 본 사람이랑 토론했다. 내 주장은 'Fuck일 것이다'였고, 같이 본 친구 주장은 '(씨)빡!'으로 추정함. 둘 중 무엇이든 난감한 건 마찬가지고... 더불어 체포될 때 내뱉는 머더퍼커 발음도 진짜 대박이더라. 이것도 그냥 봐야 알 수 있음.
주인공의 남편으로 설정된 윤상현과, 상술한 악의 무리들 외에도 한심한 남자들이 한 트럭 더 나온다. 바로 이성경의 팀원 형사들. 이들 모두 여성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도움 요청을 묵살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데, 이것 역시 이 자체만으론 큰 불만이 없다. 하지만 후반부 이성경의 연설 아닌 연설 하나만 듣고 바로 태도 돌변하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짐. 아니, 아무리 조연 캐릭터들이라지만 최소한의 감정 변화는 만들어줄 수 있잖아.
남자 캐릭터들만 깠지만 여자 캐릭터들도 문제 많다. 딱 하나만 골라잡자면 수영이 연기한 국정원 출신 해커 캐릭터. 사실 이 캐릭터만의 문제라기 보다는 충무로에 있는 모든 영화인들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충무로 영화인들이 '해커'라는 직업에 갖는 판타지가 너무 고정적이고 일관된 것 같다는 게 문제다. 대충 안경 쓰고 어디 틀어박혀서 모니터 열 댓개 보며 키보드 겁나 눌러대면 뭐든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그 순수함이 문제라면 문제. 차라리 국정원 댓글 부대 출신 민원 접수원 설정까진 괜찮았으나 역시 집에선 또 그러고 있더라. 모니터 여러개 두고 현실엔 존재하지도 않을 가짜 프로그램들의 인터페이스를 보며 손 놀리는 꼴이라니...
대사가 굉장히 노골적인 영화다. 모든 걸 다 대사로 설명하려는 그 패기. 근데 그걸 결국 잘 못 해내는 객기. 캐릭터들 전사도 죄다 말로 설명하고 심지어 영화의 핵심 주제도 죄다 말로 쇼부친다. 아무리 그래도 후반부 이성경의 연설은 그러면 안 됐다. 여기서 이성경 캐릭터가 제일 빛나고 멋져보여야 하는 건데 '그럼 피해자들의 상처는 누가 닦아주나요?' 식의 공익 광고스러운 대사 여기서 치고 있으면 어떡해.
<자전차왕 엄복동> 걸고 넘어지면서 '걸복동'이라는 수식어 붙여 까고 놀리고 하는 영화인데, 진짜 <자전차왕 엄복동> 봤다면 그런 소린 안 나올 거다. 그 영화에 비하면 이 영화 정말 잘 만든 영화라고... 물론 그 영화에 비하면이지, 그냥 놓고보면 안일하게 만든 충무로 기획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영화. 항상 하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여성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좀 정신 차렸으면 좋겠다. 잘 만들어야 또 다음 여성 영화의 기회가 보장되는 건데 계속 이딴 식으로 싸지르고 있으면 어쩌란 건가. 아, 물론 이 영화의 일부 코미디 감각은 참 좋음. 감독님 그냥 본격 B급 코미디로 가시면 잘할 것 같은데.
덧글
로그온티어 2019/05/13 22:37 # 답글
CINEKOON 2019/05/18 2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