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영화, 엄청 뻔하다. 과묵한 만능 킬러 남자 주인공이 옆집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가 몸담고 있던 어둠의 세계가 그 여자를 위협하게 되자 결국 주인공이 피의 복수를 벌인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지하게 많지 않나. 게다가 그 영화는 후까시도 엄청 잡는다. 따지고 보면 별 것 없는 이야기에서 폼만 겁나 잡아댄다는 거다. 근데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후까시가 멋져 보였다. 바로 이런 곳에서 연출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마리아>도 후까시를 엄청 잡는 영화이지만, 정작 폼은 안 나는 영화다. 태어나서 본 모든 액션 영화들의 클리셰가 이 한 편에 몰빵 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킬러로 이름 날리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새로 얻은 가족들, 특히 딸과 알콩달콩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은 <악녀>의 그것과 비슷하다. 근데 과거 동료들이 그녀의 신분을 알아내 그 가족들을 싸그리 죽여버려서 그녀가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뭐...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보다보면 <아저씨>도 생각나고 <이퀄라이저>도 생각나고 <폴라>도 생각나고 하여튼 그렇다. 여기에 어둠의 조직들끼리 맺은 협정과 그 협정이 유효한 숙박업소의 이미지는 <존 윅>의 그것이며, 중간에 등장하는 롱테이크 트래킹 액션씬은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씬을 노골적으로 가져온 장면이다. 아니,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감독이나 제작진이 왠지 한국 영화 열심히 봤을 것 같더라고. 그 폭력성의 수위도 그렇고 특유의 분위기도 그렇고.
이뿐만이 아니다. 세부적인 부분들 역시 모두 클리셰 총집편인데, 막판 최종보스와 싸울 땐 건파이트가 아니라 꼭 주먹으로 단도리질 해야함. 게다가 싸움터는 모래밭 위고, 여기에 갑자기 비까지 내린다. 물론 장르 영화에서 클리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적절히 사용하면 긍정적 의미의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근데 이 영화는 그냥 고민이 없었고, 무엇보다 세련되지 못한채 투박하고 촌스러웠다.
아니,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 감독은 클로즈업과 원수를 졌나? 영화에 클로즈업이 거의 없다. 액션 장면은 물론이고 인물들의 감정이 중요한 장면들 역시 죄다 바스트샷 이상의 쇼트 사이즈로 찍어놨다. 그래서 몰입이 안 된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다. 액션 동작은 화려하지만 별 감흥이 없고, 인물들의 대화에선 누구의 감정에 집중해야할지 분간이 안 선다. 조직의 우두머리를 소개하는데 카리스마를 주고 싶었더라면 클로즈업도 넣고 했어야지. 이 영화는 조직 우두머리가 사람 마구잡이로 패고 죽일 때도 그 흔한 클로즈업 하나 없다. 그러다보니 이 우두머리가 별로 안 무섭고, 그냥 맥락 없이 사람 패기만 하는 허수아비로 보인다. 이건 진짜 큰 문제다.
이 영화에서 뻔하지 않았던 건 딱 하나. 어린 여자 아이를 과감하게 죽여버렸다는 것. 근데 이것도 영화 외적으로 봐야 신선한 거지. 어린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는 건 액션 영화의 불문율 중 하나니까. 근데 진짜 놀랄 게 딱 이거 하나 밖에 없음. 나머지는 영화가 너무 재미없고 감흥없어서 놀라게 된다.
영화 다 보고 나서 생각했다. 요즘 넷플릭스가 나한테 서운한 게 있나? 저번엔 나에게 <어제가 오면> 추천하더니 이번엔 이 영화를...... 엿 먹어보라는 건가? 이 영화에 투자한 넷플릭스 제작팀이랑 이 영화를 내게 추천한 넷플릭스 빅데이터 둘 중 하나는 찢어발겨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뭘 고르는 게 나을지 잘 모르겠다. 둘 다?
덧글
로그온티어 2019/05/25 20:05 # 답글
의외로 왓챠가 제 취향 잘 잡아줬던 게 기억나네요. 기가 막히게 맞춰주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넷플릭스 보단...
CINEKOON 2019/05/26 1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