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6 17:08

알라딘 극장전 (신작)


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1992년도에 나온 원작을 보고 갔던 게 과연 잘한 건지 아닌 건지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아무리봐도 비교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리메이크 영화잖아.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작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게 나쁘게만 볼 작품은 또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가장 후진 건 감독 선정 정도. 그 외에는 이렇다할 장점도 없지만 이렇다할 단점도 없는 영화거든.

작품에 대한 만족도는 크게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미녀와 야수>의 감독으로 빌 콘돈을 내정했던 디즈니의 선택은 짐짓 이해가 가능한 어떤 것이었다. 그래, 잘 쳐줘서 <신데렐라>의 케네스 브레너까지도 인정. 그리고 정말 많이 봐줘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덤보>의 팀 버튼도 그럴 수 있다. 여전히 디즈니와 안 어울리는 감독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동화적인 색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용인 가능한 부분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알라딘>의 감독이 가이 리치인 것은 이해가 안 간다. 막말로 원작 <알라딘>의 내용 중에 가이 리치와 어울리는 건 주인공이 도둑놈이라는 설정 그거 딱 하나 밖에 없잖아.

혹시나가 역시나, 감독으로서 가이 리치의 개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영화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와 <스내치> 함께 보여주고 둘 다 같은 사람이 만든 거라고 하면 뻥치지 말라고 할 걸? 그 정도로 가이 리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영화. 재밌게 본 작품은 역시 아니지만 그래도 가이 리치 특유의 감성은 잘 녹아있던 근작 <셜록 홈즈>와 비교해봐도 도무지 공통점이 없다니까. <킹 아서>의 실패 때문에 기존의 연출 스타일을 다 버린 건지, 아니면 디즈니가 강압적으로 공무원 마인드를 주입해 이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으니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지도.

그걸 제외하고 본다면 비교적 괜찮은 가족 영화다. 개성 넘치는 주변 인물들 때문에 주인공의 개성이나 존재감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이야 원작의 단점이기도 하니까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게다가 비교적 신인 배우잖아. 그건 그럴 수 있음. 그나마 자스민 역할의 나오미 스콧이 잘 잡아주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도. 원작 애니메이션엔 없는 이 영화만의 오리지널 뮤지컬 넘버가 하나 나오는데, 그게 자스민의 솔로 곡으로 배당되어 있다. 근데 이거 배우가 잘 해내기도 했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왕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힘겨움과 다짐 같은 것들이 담겨있는 곡인데, 누가 봐도 페미니즘을 의식한 모양새. 하지만 이 정도면 잘 해냈다고 본다. 가련한 여성이 운좋게 잘난 남자 만나 인생 역전하는 스토리였던 <신데렐라>에서 이런 노래 불렀으면 욕 먹어도 싼 건데, 적어도 자스민은 안 그렇잖아. 원작에서 꽤 지적이고 자애로운 군주로 묘사된 적이 있고, 그 외에도 목적을 위해 관능적 미인계를 적극적으로 써먹었던 인물이기도 하니까. 신데렐라가 불렀으면 억지로 낑겨넣은 PC로 전락 했을텐데 화자가 자스민이라 괜찮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이 영화 역시 결국 지니의 영화다. 원작 애니메이션이 로빈 윌리엄스의 지니 쑈였다면, 이 영화는 윌 스미스의 지니 쑈. 로빈 윌리엄스의 그것보다는 다소 아쉬운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면 꽤 만족할 만한 수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고편을 통해 지니의 모습이 첫 공개 되었을 때 욕 꽤나 먹었었지. 하지만 CGI로 만든 푸른 피부톤의 지니가 내뿜는 일종의 이질감이 묘하게 마음에 든다. 어차피 판타지 정령 캐릭터인데 현실과 이 정도로 선 긋는 것도 괜찮잖아?

랩 말고 윌 스미스의 노래는 처음 듣는 것 같았는데, 물론 오토튠으로 만진 이후이겠지만 그럼에도 꽤 흥겹다. 잘 한다. 로빈 윌리엄스 버전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래퍼로서 활동했던 이력을 살려 힙합 요소를 군데군데 넣은 것도 좋은 선택. 어차피 로빈 윌리엄스를 이기지 못할 거라면, 아예 다른 자기만의 색을 넣는 이런 전략도 좋다. 아주 훌륭하게 먹혔다고 생각한다. 영화보는 내내 그냥 지니만 보고 싶었다.

자파는 존나 문제. 음침한 매력이 있던 원작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사악한 마법사 느낌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자란 귀공자 스타일이더라. 2인자 콤플렉스 있는 걸로 설정 잡은 건 좋은데, 명색이 악당임에도 별로 무섭지 않은 건 큰 문제다. 그리고 원작에서 궁궐 통째로 옮기라고 지니 닦달하던 모습이 없어서 아쉬움. 거기서의 지니는 정말 강대한 마왕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번 영화엔 그런 게 없다. 자파는 첫 소원 왜 빈 거임? 아니, 지니도 좀 웃긴 게 술탄 되게 해달라고 소원 빌었으면 옷만 갈아입혀줄 게 아니라 그 부하와 백성들의 인식까지도 모두 기억조작해서 바꿔줬어야 하는 거 아님? 역시 계약서는 쓸 때 잘 보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써야 하는 게 진리.

새삼스럽지만 디즈니의 힘을 또 느낀 영화였다. 영화 자체로만 놓고 보면 그냥 저냥 평범한 영화인데, 극장에서 볼 때 내 안의 어린 소년과 같이 앉아 영화를 보는 기분이더라. 디즈니야, 너네 정말 여러모로 대단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뱀발 - 활용도가 현대의 드론 뺨칠 정도인 자파의 앵무새 이아고. 그의 목소리를 알란 튜딕이 맡았더라. <로그 원>에서 K-2SO를 연기했던 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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