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9 10:54

황산벌, 2003 대여점 (구작)


당신이 한국영화의 팬이라면, 이준익을 싫어할 수는 있어도 그것 하나만큼은 인정해야할 것이다. 충무로에서 가장 성실한 감독이 바로 그라는 사실을. 이준익은 감독으로서 발써 십여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대개는 간격으로 개봉되었으니 이쯤되면 개근상이라도 받아야 마땅할 지경이다.


만든 영화의 수가 많은 만큼이나 사람마다 그의 작품들 선호도는 죄다 다를 것이다. 그의 최고 흥행작은 <왕의 남자>였고,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라디오 스타>. 누구는 자리에 <동주> <사도> 놓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 가장 야심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황산벌> 이야기할 것이다.


<황산벌> 괴상한 영화다. 역사 늠름한 장군들이 등장해 영웅적 카리스마를 과시해도 모자랄 판인데 영화는 그들의 이미지를 모두 반대로 꺾는다. 표준말을 쓰며 영웅적 고뇌를 읊조려야할 같은 백제의 계백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시방 뭐라고 혔냐?" 외치고, 반대 진영 신라의 김유신은 대장군이라는 위엄찬 직책에도 '' '' 발음하며 웃음을 준다.


타란티노가 <바스터즈> 통해 유럽의 지형도를 언어와 제스처로 재구분하여 깨알같은 웃음을 주었던 것처럼, <황산벌>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사투리를 각자 다른 나라의 언어로 간주하며 한데 버무린다. 신라 진영에 숨어든 백제의 첩자들이 전라도 사투리를 감춘채 어설픈 경상도 사투리로 첩보전을 펼치다 홧김에 입에서 나온 '거시기' 단어로 인해 파멸을 맞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지역색 쌍욕 배틀을 비롯해 과감한 패러디를 통해 웃음을 주던 영화는, 중반부에 이르러 과감한 변속을 시도한다. 영화 모든 이들은 각자의 '이름' 걸고 전쟁에 임한다. 신라의 장군들은 가늘고 길게 사는 사람치고 역사에 남는 사람 없다며 자신의 아들들이 자살 돌격대로서 죽기를 강요한다. 백제의 계백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거라 부하들에게 일갈한다. 그렇다. 전쟁은 결국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없는, 이름을 걸지 않고는 없는 궁극의 공격적 행위. 


때문에 영화 마지막 씬의 주인공이 계백도, 김유신도 아닌 이문식의 이름 없는거시기라는 점은 영화의 여운을 짙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서 불현듯 울려퍼지는 계백 아내의 대사.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것이여! 인간아!” 일찍 죽어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몸을 부대끼며 살아내는 멋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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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평양성, 2010 2019-07-09 10:56:47 #

    ... ont: 12.0px 'Helvetica Neue'; min-height: 14.0px}span.s1 {font: 12.0px 'Helvetica Neue'}&lt;황산벌&gt;은 괴상하게 대단한 영화였다. 코미디로써 제 할 일을 하면서도, 아주 사소하고 짐짓 당연해보이지만 그 때까지는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기막힌 아이디어로 ... more

덧글

  • 엑스트라 2019/07/09 12:24 # 답글

    이 영화보고 항상 기억하는 명대사. “자슥 죽으라고 보낸 닌 안미쳤나, 제 식구들 쳐 죽이고 온 계백이는 제정신인가? 다, 미친기야, 미쳐야 하는기야, 전쟁은 미친 자들 만이 하는 짓인기야 ~~!!”
  • CINEKOON 2019/07/15 14:15 #

    김유신의 빛나는 순간.
  • 로그온티어 2019/07/09 14:28 # 답글

    풍속화같은...
  • CINEKOON 2019/07/15 14:15 #

    풍자로 겁나 잘 그린 풍속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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