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르 편식 안 하기로 맹세했는데, 그 중 호러 하나만은 언제나 예외였다. 다른 그럴 듯한 이유는 없고, 그냥 내가 겁이 많아서.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유전> 역시 보지 않았고, 애초 이 영화에도 별 관심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관심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대놓고 무시하는 정도였음. 근데 하필 절친한 인간 중 하나가 나완 다르게 이 장르 매니아라서... 그렇게 장르 애호가가 장르 비애호가를 억지로 끌고 가 봤다는 이야기.
결론부터 말하면 안 무섭다. 공포 영화 입장에서는 최고로 공포스러운 평가이겠지, 안 무섭다는 게. 근데 진짜 안 무섭거든. 고어 묘사 때문에 보는 중간 중간 스크린으로부터 눈을 뗀 순간들은 있었지만, 어쨌거나 전반적으로 본다면 공포 묘사는 크지 않은 편이다. 근데 호러 장르들 중에서도 오컬트라는 서브 장르가 대개 다 그렇잖아. 점프 스케어로 승부보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순간 어느새 등골이 오싹해지고 궁극의 절망에 당도하게 되는. 그게 오컬트라는 장르니까. 뭐,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겠다.
영화는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의 지옥을 묘사한다. 영화를 보며 꼭 교훈을 얻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이 영화의 교훈을 찾아보자면, 남자 주인공인 크리스티안의 입장에서는 '이래서 남에게 공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도의 교훈을 찾을 수 있겠다. 근데 존나 무서운 게, 그 반대편인 여자 주인공 대니의 입장에서 보면 또 정반대로 '이래서 무분멸한 공감이 무서운 거다'가 느껴짐.
영혼 없는 연애의 끝자락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둘은 연인 사이 아니였나. 하루 이틀 사귄 것도 아니고 3년 정도 사귄. 허나 크리스티안은 끝내 대니에게 진심으로 절절하게 공감해주지 못했다.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렇다. 하지만 이 염병할 스웨덴 마을 공동체의 사람들은 어땠나. 그녀들은 대니를 위해 함께 따라 울어준다. 마치 짐승이 우는 것처럼, 모두가 대니를 둘러싼채 울부짖어 준다.
이게 무서운 거다. 비록 크리스티안의 외도 아닌 외도를 목격한 건 맞지만 어쨌거나 3년이나 만난 사이인데. 그게 상대를 죽이는 결말까지 초래한다. 크리스티안의 죽음이라는 골의 어시스트는 죄다 이 헬싱글란드 사람들이 해준 거다. 그게 진심이였든 아니였든 모두 대니에게 공감해 울부짖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골 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보여주는 마지막 쇼트 속 대니의 표정. 울면서 우는 바로 그 표정. 근데 이거 누가 봐도 미친년의 모습이잖아.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웰컴 투 동막골>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꽃 꽂고 웃으면 다 미친 걸로 보는데 이 영화에선 심지어 꽃을 꽂은 정도가 아니라 김밥 마냥 꽃으로 대니를 싸멨음.
장르 영화로써 대담하고 실험적인 선택을 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무대를 굳이 북유럽의 스웨덴으로 설정하면서 얻은 '백야'라는 컨셉. 대충 봐도 호러 영화치곤 밝은 배경을 선택한 데에서 오는 실험적 자부심이 느껴지고, 그러면서도 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이 백야 현상이 사람 미치게 하기 딱 좋아 보이잖아.
허나 그 외엔 죄다 맘에 안 든다. 일단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연로했다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풍습 시연하고 있는데 거기서 왜 다 안 도망가냐고. 아무리 논문 때문이라지만 벌써 기겁하고 내뺐어야지. 여기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반응을 하는 건 미국에서 온 4인방이 아니라 런던에서 온 커플 한 쌍인데, 때문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 이건 타국의 문화와 풍습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는 관광객들의 태도에 대한 코멘트인가- 하고. 없어져야할 선입견이긴 하지만, 그런 거 있잖나. 중국 관광객들은 시끄럽고 통제가 안 된다- 라던가, 일본 관광객들은 소극적이고 조용하다- 라던가. 그 중에서 미국 관광객들은 타국의 모든 걸 신기해하고 사진 찍고 싶어하며, 모든 걸 수용하려는 태도를 겉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어한다- 라는 느낌인데 이 영화가 그걸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예민한 부분인지라 어느 특정 국가를 명시하고 또 어느 특정 풍습을 콕 찝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좀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느 나라가 인육을 먹는 풍습이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걸 그냥 그들의 문화이니 존중해야할까? 참여는 못할 망정 망치면 안 되는 걸까? 개연성을 챙기지 않는 영화의 태도가 마치 이런 문제에 대한 거대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하여튼 그런 거 다 빼고 보더라도 존나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귀신에 씌였으면 씌인 묘사라도 하던가, 왜 친구들이 하나 둘씩 누가봐도 존나 수상하게 사라지는데 왜 안 찾냐고. 이 마을 공동체 안에서 추리 장르물의 플롯을 좀 끼얹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지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말을 들어가면서 다들 순종적이잖아. 그 때문에 보는동안 내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 보다는 스웨덴식 사이비 종교의 문화 풍습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볼 지점도 많고, 장르적으로 대담한 선택을 했다는 것도 높이 산다. 그러나 항상 하는 말인 '장르물에서는 언제나 함의보다 쾌감이 우선이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게 뭔가 싶은 영화. 무섭더라도 굉장한 영화처럼 느껴졌었다면 겁쟁이 타이틀 움켜쥐고서라도 <유전>까지 호기심이 동해서 봤을 텐데, 이거 보고 나니 그냥 아무 생각 안 들더라. 무섭고 재밌기는 커녕 그냥 기분 더럽게 만드는 그런 영화. 허나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오컬트 장르물의 팬들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근데 어쨌거나 내 취향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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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온티어 2019/07/16 00:00 #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