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8 03:23

카게무샤, 1998 대여점 (구작)


처음 아마 초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별로 재밌게 보지 못했다. 어린 소년의 관심사를 끌어당길만한 소재나 스펙터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가 짧은 것도 아니니까. 그러던 영화를 다시 보게 고등학생 시절. 때가 게임 스테이지 해치우듯 구로사와 아키라 필모그래피 한창 깨고 있을 때였지. 앞에 영화들 재밌게 봤었기 때문에 <카게무샤> 대한 기대도 컸었다. 근데 영화 틀고 보기 전까진 초등학생 봤던 영화가 영화였는지 전혀 몰랐다. 애초 흥미가 없었으니까. 하여튼 본의 아니게 2회차 관람하면서야 비로소 재밌게 봤던 영화. 그리고 이번에 3회차 관람으로 다시 봤으니 어느새 10 만인 거네.


서구적인 이야기의 원형을 동양의 스타일로 풀어내는데 거의 경지에 올라있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 거시적으로 보면 거대 규모의 엑스트라 촬영과 수십 마리의 말들을 대동한 전투장면 촬영, 화려하고 거대한 세트 로케이션 촬영 그냥 있는 그대로만 봐도 대단한 스펙터클의 영화다. 근데 대단한 , 거시적인 면에서만 끝나는 아니라 미시적으로 봤을 때도 굉장히 세련되면서 전위적인 연출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 


막말로 거대 규모의 스펙터클만 있는 영화였다면 정도로 인정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허나 구로사와 아키라는 격렬한 전장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도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았던 남자의 심리를 명백하고도 기깔나게 표현해 보여준다. 주인공의 뒤숭숭한 장면 씬은 그래서 대단하다. 사실 이런 이렇게 길게 만들어 넣으면 대중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감이 서잖아. 근데 아키라는 그냥 밀어 붙였다. 근데 그것도 그냥 밀어 붙인 아니라 겁나 완벽하게 밀어붙였음. 알록달록해 멀리서 보면 흡사 탱화를 연상케하는 스튜디오 세트에서의 남자 모습. 테이크로 일관하다가 잔잔한 수면을 통한 심리 전달, 그리고 이어지는 매치 . 물장구 치는 꿈꾸다 기겁하여 일어났는데 거기서 파도 그림을 깔다니. 정말이지 영민한 연출자라고 밖에는 없는 것이다.


장면에서 투명하게 보이듯이, 영화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쥐고 있지 못한 자의 불안하고 답답한 상태를 보여준다. 그림자에 색칠한다고 실체가 되는 아니지 않나. 그걸 알면서도 주인공은 운명의 부름에 응했고, 결국 파국 아닌 파국을 맞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 중에서도 비극적 엔딩 탑에 든다고 본다.


근데 존나 웃긴 카게무샤로서 대활약했다기에는 주인공 스스로가 성취해 해낸 별로 없다는 . 태어나기 전에 자기 얼굴 선택할 없는 것이니 다이묘랑 비슷한 생김새 가진 거야 얻어걸린 거고, 많은 부하들 앞에서 당할 위기였는데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도 순전히 임기응변이었음. 물론 순발력도 실력이라면 실력이지만... 하긴, 우리 나라의 <광해 - 왕이 남자>처럼 자리를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차지하려 드는 전개는 어울리긴 하지. 결국 허무주의로 끝나는 영화이니 순전히 얻어걸린 전개가 맞는 같기도 하다. 자기 능력으로 일군 모든 순간에 잃어버리는 것보다, 운이 닿아 마치 여름 밤의 꿈처럼 안에 들어온 모든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절망적이지 않을까.


영화 내내 물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그림자의 실체라 있을 다이묘 신겐은 죽음을 맞이한 호수에 수장되고, 실체를 따르는 그림자였던 카게무샤는 호수에서 신겐을 다시 만난다. 잔잔한 수면 위에 일렁였던 것은 실체였을까, 그림자였을까. 영화 결말부에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면서까지 카게무샤가 잡으려 했던 것은 강물에 잠긴 신겐의 깃발이었다. 결국 깃발을 다시 손에 쥐어보지 못한 채로 물에 떠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보는 내가 허망해졌다. 그럼에도 수장된 실체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최후를 맞이 했으니,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덧글

  • 로그온티어 2019/08/10 04:33 # 답글

    이 영화도 마스터피스라고 해서 보려고는 했는데 보다가 흥미를 잃어서 한번 끊었던 게 기억나네요. 아키라 씨의 다른 작품도 봤지만 라쇼몽같은 통찰력있는 작품보단 요짐보와 7인의사무라이같은 오락작품을 더 좋아하기도 했던 이유도 있고요.

    제가 이 영화를 보려 했던 이유가, 이 영화가 인생에 꼭 챙겨봐야 하는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죽기 전에 저걸 챙겨봐야 하나"라는 생각과 이걸 놓치면 인생의 진리를 잃을것만같은 망상까지 들어서요.

    여기서 더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내게 특성화된 능력이 있지만 업계에서 알아주지 않는 능력이라면, 나는 업계가 알아줄 만한 능력을 키워야 할 거에요. 늘 제가 듣던 이야기는 당신의 창의성을 기르는 게 중요하지만, "엇나가면 안된다"였어요. 모두가 제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걸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창의력을 이용하라는 말이었죠. 그렇게 살던 어느 개발자는 문득 내가 이러려고 이 일을 한 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래서 인디계로 오는 경우가 많았죠.

    어떤 일을 하다보면 일을 하기 위해 만든 페르소나에 내가 잠식되기 마련입니다. 남이 원하는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살다가, 남이 원하는 페르소나적 이미지에 다다르지 못하면 내가 정상이 아니게 될 지도 몰라라는 생각으로 변하는 겁니다. 교양있고 철학적이고 매너좋는 사람이 되고 싶죠. 보다 폭넓고 생각도 깊은... 근데 아니에요. 일부는 방탕하다 이겁니다. 허나 그 이미지를 갖추기 위해, 그 이미지에 매료되어 버려서, 취미로만 보던 영화까지 선택하고 마는 거에요.

    나는 누구였을까? 어느샌가 남에게 보기 좋은 사람으로 자신을 다듬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내가 없었단 생각이 들어요. 이대로 내가 원치않은 삶을 살기 싫은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그 피로감에 절게 되는 거죠.

    꿈 속에서 나는 다른 행동을 해요. 현실과 다른 활기차고 모험을 추구하는 사람이죠. 허나 현실의 저는 어느덧 안전을 추구하고 겸허히 모든 걸 받아들이는 성격이 되었어요. 호접지몽처럼, 저게 내 진짜일까 이게 내 진짜일까?

    고민하다 보면 그 생각도 드는 겁니다. 꿈에서 깨어나고, 꿈이 예상치 못하게 꾸어지게 되는 것처럼, 문득 이러다 죽음도 찾아올거란 거죠. 정신 차려야 한다, 나를 찾아야 한다, 내 삶을 살고 싶다라는 열망에 고뇌하지만, 어느 정신없는 순간에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참으로 묘하고 허무한 거죠.
  • CINEKOON 2019/08/24 11:31 #

    본문보다 이 댓글이 이 영화 리뷰로써 더 쩌는데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