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3 14:58

유열의 음악앨범 극장전 (신작)


소년원 출신 남자와 부모 잃고 경제적으로 이 곳 저 곳을 전전하는 여자의 운명적인 만남과 이별. 운명? 좋다, 이거야. 난 운명 보다는 인연의 힘을 더 믿는 사람이지만, 멜로 드라마라는 장르에서 '운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요소였으니 장르적 요소의 일환으로 나름 쿨하게 받아들여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이야기가 개차반인 게 사실이다. 먼저 주인공 두 인물을 만든 뒤 이야기 전개의 필요에 따라 이별과 만남의 텀을 넣어야 하는데, 어째 이 영화는 반대로 한 것 같음. '이쯤에서 얘네 둘 붙여놓고, 이쯤 가서 또 다시 만나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먼저 한 뒤 그 설계도에 억지로 맞춰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는 인상이다.

디테일한 부분에서의 작위성 역시 드러난다. 어떤 남자가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가 작은 볼펜 따위를 무거운 가구들 사이 틈에 떨어뜨렸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보통의 남자들은 효자손이나 뭐 길쭉한 것 가져다가 긁어서 꺼내지 않아? 근데 여기 남자 주인공은 안 그래. 볼펜이 아니라 생일 축하용 초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거 꺼내려고 굳이 무거운 카운터를 들어 뒤로 뺀다. 왜? 그 카운터 뒤에 있는 여자 주인공의 어린 시절 낙서를 발견해야 하거든. 이런 게 영화에 수도 없이 많다. 또 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남녀 주인공 사이에 연락이 닿는다. 근데 갑자기 남자 주인공이 웬 사건에 엮여 휴대전화 망가짐. ...... 이거 90년대가 아니라 70년대 영화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촌스러움 아니야? 죄다 이해가 안 가는데, 순전히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넣은 설정들. 후반부 여자 주인공은 왜 남자 주인공의 트라우마 근원지로 찾아가는가? 거기 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지 않아? 단순히 그냥 남녀 주인공 말싸움 붙여볼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남자 주인공의 우상화도 노골적이다. 물론 멜로 드라마의 주 타겟 층이 여성 관객들이란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때문에 남자 주인공을 조형하는 것은 여자 주인공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하지만 이 정도면 그냥 80년대 청춘 만화에서 튀어나온 설정 아니냐고. 소년원 출신이란 설정이 있지만 이건 그냥 순전히 이 남자에게 슬픈 과거를 만들어주기 위해 넣은 설정이다. 소년원 출신이라는 게 별로 대단하게 묘사되는 것도 아니고. 잘 생겼지, 예쁜 너털웃음 잘 짓지, 친절하지, 요리 잘하지, 자기 일에 열심이지, 나만 사랑해주지, 근데 거기에 모성애로 감싸 안아주고 싶은 슬픈 과거도 있고 또 주먹 쓸 땐 또 쓰는 남자. 그러면서도 혼자 여자친구의 가족을 찾아가 미래를 논하는 남자. 아무리 봐도 이거 너무 과한 판타지 아니냐?

멜로 드라마는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무척이나 중요한 장르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계속 단절되다보니 공감대 형성할 틈이 없다. 여자 주인공의 직업은 별다른 복선없이 휙휙 바뀌고, 남자 주인공의 직업은...... 하긴, 남자 주인공에 대면 여자 주인공은 비교적 양반이지. 남자 주인공이 방송과 영상 쪽에 관심있다는 설명 하나도 없었잖아? 근데 갑자기 카메라 들고 설쳐댄다. 이건 또 뭐야... 이것도 순전히 '유열의 음악앨범'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위해 만든 설정 아니냐고. 나중에 보이는 라디오 중계 하면서 여자 주인공이랑 재회해야하니까. 그 장면 이야기하니까 그거 떠오르네. 아니, 캡틴 아메리카 마냥 뛰어서 자동차 따라오는 애한테 이제 우리 정말 끝이라는 뉘앙스 풍길 땐 언제고 방송에서 이름 한 번 불러줬다는 이유로 헐레벌떡 다시 찾아가는 건 뭐야. 이 정도면 애초에 헤어질 마음 아예 없었던 거 아니냐?

음악 영화로써도 형펀 없다. 여러 명곡들을 가져다 쓰긴 했지만 곡 자체로 좋을 뿐 해당 곡들이 장면에 기여하는 바가 크게 없다. 잘 엮여들질 않는다. 그냥 귀만 호강할 뿐. 여기에 드는 또 하나의 생각. 굳이 제목이 '유열의 음악앨범'일 필요도 없지 않았어? 그 라디오 방송으로 전달되는 것도 마지막 부분 빼면 뭐 없더구만. 그냥 노골적으로 90년대 레트로 감성 조지려고 한 거지.

그냥 실패한 영화다. 멜로 드라마로써 예쁜 두 남녀 배우의 얼굴을 담아내는 방식은 좋지만, 그 외의 모든 요소들이 죄다 노골적으로 무너진 영화. 정지우 감독은 <4등> 같은 작품 만든 게 얼마 전인데 왜 계속 이러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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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09/04 01:39 # 답글

    제목 탓에 저는 살인에 유희를 느끼는 연쇄 살인마가 나와 앨범의 가사대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남행열차라면 비내리는 호남선 철로에 사람을 묶어 놓았다던가, 슈퍼맨의 비애라면 사람을 고층 빌딩에서 떨어뜨리고... 뭐, 그런 거요. 심장이 없어라는 노래가 나오면 정말 심장이 도려진 시체가 나타나고
  • CINEKOON 2019/09/17 08:10 #

    ...... 정말이지 한결 같으셔서 무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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