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명 군인 신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 중이었는데, 눈 떠보니 웬 기차 안. 게다가 앞자리에 앉은 생판 처음 보는 여자는 내게 아는 체를 한다. 사태 파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차는 미련없다는 듯 폭발해버리고, 주인공 콜터는 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채 죽음을 맞게 된다. 근데 웬걸, 여기서 끝난 건 줄 알았는데 눈 떠보니 이번엔 웬 캡슐 안이잖아. 딱 봐도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생긴 설명 담당 박사 왈, '자네는 소스 코드로 8분동안 과거에 사는 거야'
8분이라는 시간 제한 설정만 빼면 <엣지 오브 투모로우>나 <사랑의 블랙홀>이 연상되는 영화다. 계속해서 같은 시간을 살아야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니까. 다만 <엣지 오브 투모로우>가 그걸 액션 장르의 외피를 두른채 하는 사랑 이야기였고 <사랑의 블랙홀>이 코미디 장르로 포장된 일종의 교훈극이었다면, <소스 코드>는 주인공 콜터 대위의 인간적인 면모와 인간애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콜터 자체는 존나 불쌍한 인물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들 중에 이토록 기구한 팔자에 빠져있던 주인공은 별로 못 본 것 같다. 이런 거 봤던 걸 벌써 다 잊었어?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 몸의 절반을 잃고 의식 불능에 빠진 것만으로도 이미 기구한 팔자의 정점을 찍는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가족들에겐 그가 그냥 전사 처리 되었으며, 육체의 기운은 사그라들었을지언정 정신만은 말끔하건만 그마저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영원불멸하게 굴려질 위기에 처한다. 이는 어쩌면 죽어서도 굴려지는 국가 공무원의 비애를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아 좀 웃기면서도 씁쓸하기도. 군인에 대한 예우를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 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인데, 어쨌거나 미국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애초에 '군인'이라는 직업은 죽는 것이 상정되어 있는 일일테니까.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도 말했잖아. 군인들이 트럭째로 폭발해 죽어도 아무도 관심 안 가질 거라고. 애초에 그건 다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말이 계획이지 좀 의역하면 죽는 게 당연한 존재들일 테니까- 라는 뜻이었겠지.
이야기가 전통적으로 갖는 기본적인 잔재미들이 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와 <사랑의 블랙홀>도 그렇잖아. 계속해서 도전하게 되는 게임 스테이지의 재미랄까. 어느 시점에 어느 부분에서 어떤 게 튀어나올지에 대해 점점 익숙해져가는 그 재미. 물론 계속 반복만 하면 그 재미도 얼마 못가지. 그래서 영화는 주인공에게 주어진 그 8분을 계속해서 변주해나간다. 그리고 그걸 재밌게 썩 잘했다.
추리로 범인을 옥죄는 미스테리 장르로써는 좀 심심한 감이 없지 않다. 악당의 정체는 쉽고 그의 동기는 단선적이다. 허나 이건 못 만든 각본의 결과물이 아니다. 내가 봤을 땐, 감독이나 제작진들이 이 쪽 부분에 별 관심 없었던 것 같음. 연쇄 폭탄 테러와 그 테러범을 잡기 위한 추리 과정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밑그림에 불과할 뿐. 때문에 나는 이 영화가 결국 인본주의적 시각을 다루는 데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생각한다.
나는 이미 죽었지만, 그리고 그들 역시도 이미 죄다 죽었지만. 한마디로 이미 모든 게 다 끝난 게임이지만. 그렇게 가상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임 속 NPC 같은 사람들이라해도 어쨌거나 나와 한 번쯤 눈을 마주치고 말을 섞어본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콜터의 마음. 이미 연쇄 폭탄 테러범을 검거하는 임무는 성공했건만, 굳이 콜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스코드 속으로 떠나고자 한다. 순전히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구해보기 위해서. 수 십 또는 수 백 번의 소스코드 과정 속에서, 콜터는 그들이 모두 죽는 모습 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모두 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콜터는 아버지에게 끝까지 전하지 못한 말들도 해야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나를 보며 웃어주었던 내 앞자리의 그녀에게 따뜻한 말도 전해주고 싶다. 그래서 그는 그걸 다 한다. 세상도 구하고, 사람들도 구한다. 아니, 사람들을 구함으로 인해 세상이 구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 결말부에 나오는 시간이 멈춘 쇼트는 아름답다. 8분이라는 정말 짧은 시간 동안에, 그저 열차 한 칸을 같이 탔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구해낸 콜터의 모습에 나도 기뻤다.
여러모로 인본주의적인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연출도 존나 잘했고. 사실 그래서 <워크래프트> 영화를 보러 극장엘 갔던 거지. 그 게임 별로 해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지만, 오직 던컨 존스라는 이름 하나 믿고 표값 냈던 거지. 그렇게 뒷통수 세게 맞을 줄은 몰랐었지만. 하여튼 흑역사는 잠시 접어두고, <소스 코드>는 정말 최고였다. 극장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략 다섯 번은 넘게 본 것 같은데, 볼 때마다 더 좋아지는 게 아니라 그냥 한결같이 좋다. 언제나 나의 올타임 베스트 중 하나.
덧글
로그온티어 2019/09/25 03:52 # 답글
이거랑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생각나네요. 그건 결말이 갑자기 술술 풀려서 의문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거 결말해석을 [토탈리콜]처럼 '주인공의 꿈이다'에 맞춰보는 편입니다. 주인공이 거기 갇혀서 상황이 자기 뜻대로 술술 풀리는 꿈을 꾸는 거죠. 만일 이게 정설이라면 필립 K 딕이 늘 그리던 주제와 비슷해질 겁니다. 꿈을 꾸고 있다는 절망적 현실을 견딘다기 보다는,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거죠.
CINEKOON 2019/09/29 16:27 #
포스21 2019/09/25 15:00 # 답글
CINEKOON 2019/09/29 1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