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8 18:52

예스터데이 극장전 (신작)


잭 말릭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무명 가수다. 말이 좋아 가수지, 하루 일과 중 가수로서 활동할 때보다 대형 마트 점원으로서 일할 때가 더 많으니 그것조차 애매하긴 하네. 하여튼 잭 말릭은 자신의 유일한 후원자라 할 수 있을 로드 매니저 겸 소꿉친구 엘리와 함께 무명 가수로서 전전긍긍하다가, 밤 길에 넋 놓고 자전거 타던 중 버스에 치여 그만 정신을 잃게 된다. 재밌는 건, 잭이 정신을 잃던 바로 그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전 지구가 10여 초 간의 정전 상태에 있었다는 것. 다행히 잭은 크게 다치지 않고 병원에서 눈을 뜨지만, 이후로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팝스타 비틀즈를 알지 못하게 된 것. 그야말로 비틀즈의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진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늘 하는 망상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삭제된 존재가 비틀즈 뿐만이 아니란 것이 나중에 더 밝혀진다. 코카콜라가 없어 펩시가 지구 최고의 탄산 음료가 된 세상이기도 하고, 비틀즈와 더불어 최고의 영국 팝밴드 중 하나인 오아시스도 없어짐. 하긴, 오아시스는 애초에 비틀즈에 대한 존경을 담아 음악을 만들던 밴드이기도 하니 비틀즈가 삭제되었다면 함께 동귀어진하는 것이 이치에는 더 맞겠다. 여기에 조앤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도 삭제. 이쯤되면 각 분야에서 먹어주는 탑 1들이 다 삭제된 세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누구나 해보는 망상이다. 꼭 비틀즈가 아니더라도, 그런 적 있지 않나. 나도 맨날 상상한다. <리틀 미스 선샤인> 같은 영화의 존재를 세상 사람들이 모르면 얼마나 좋을까. 그걸 나만 알고 있어서, 그 완성본 대로만 영화 새로 찍어도 대박일 텐데. 이런 망상 맨날 하지. 여기에 좀 더 욕심 내면 <기생충> 같은 것도. 돈도 벌고 상도 받고 얼마나 좋겠어.

이는 영화의 분명한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일단 장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해봤을 망상인지라, 소재 자체에 대한 공감이나 감응도 훨씬 빠르고 관심도 더 갔을 것이라는 점. 그럼 단점은? 역시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해봤을 망상인지라,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여러번 반복 재생된 이야기라는 점.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가 망했다. 그 재미있는 망상적 소재 바로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준비 해놓은 게 없다. 그나마 중간에 주인공인 잭 말릭 외에도 비틀즈를 기억하는 존재들이 있다-라는 설정으로 묘하게 스릴러적 스탠스를 취하지만, 그 접근은 곧바로 취하된다. 아니, 막말로 영화 중후반부 제작발표 기자회견에서 그 존재들이 난입해 노란 잠수함 장난감 들고 주인공에게 비틀즈를 아냐고 따지는 장면을 넣었다면 그 후반엔 좀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나 새로운 갈등이 전개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주인공에게 비틀즈의 존재를 따지던 두 중년 남녀는 기자회견에서의 공격적인 태도가 무색하게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잭 말릭을 포옹 해준다. 비틀즈의 음악을 너무 듣고 싶었는데 우리 둘은 음치라 안타까웠다고. 그러던 중 당신이 나타나 그들의 음악을 다시 연주해주는 것에 큰 감사를 느낀다고. 에라이 시발 이럴 거면 기자 회견 장에서 그런 태도로 난입 했으면 안되는 거였잖아.

감독은 대니 보일이지만, 제작사는 워킹 타이틀이고 각본은 리차드 커티스가 썼다. 때문에 <알라딘>의 가이 리치가 그랬던 것처럼, 대니 보일의 개성은 옅은 편. 대체 왜 연출을 수락했나 의문이던데 하여튼. 영화 자체는 로맨틱 코미디 또는 음악 영화로써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둘 중 어느 것으로도 괜찮지가 않다는 것.

로맨틱 코미디로써 따지자면 남자 주인공이 너무 매력 없다. 여기에 여자 주인공은 잘못된 대사 작법과 캐릭터 조형으로 인해 끊임없이 남자 주인공의 발목을 잡는 이상한 여자가 됐다. 막판엔 현재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버리고 주인공에게 달려가 안기기도 함. ......이게 뭐야. 여기에 그 현 남자친구의 태도가 더 가관이다. '가. 난 언제나 너에게 두번째란 걸 알고 있었어' 에이 시바 이런 쿨한 남자가 세상에 어디있어.

음악 영화로써는 더 최악인데, 우리는 최근에 이미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지 않았나. 영화적 완성도에 따른 호불호는 있었을지언정 최소한 그 영화는 불멸의 락밴드인 퀸의 명곡들을 제대로 전시 해내긴 했었잖아. 심지어 영화 막판 20분은 내내 공연 장면만 틀어주는 건데 대체 어떻게 흥분을 안 할 수가 있냐고! 그럼 이 영화는? 솔직히 까놓고 말해 비틀즈라면 퀸 이상의 파급력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영화는 음악 영화로써의 정체성을 각인하는데 별 관심이 없던 모양새. 말 그대로 노래가 별로 안 나옴. 'Let it be'는 첫 소절만 세 번 반복하다 끝나버리고, 'All you need is love' 역시 제일 유명한 소절이 몇 번 반복되는데에서 그친다. 거짓말 말고 진짜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완창되는 노래는 'Hey, Jude'인데 그것마저 엔딩 크레딧에 나옴. ...... 이럴 거면 대체 비틀즈 음악 저작권은 왜 딴 거냐.

분명 빛나는 순간들도 있다. 주인공이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는 존 레논을 만나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종종 영화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마 비틀즈 멤버들은 이 영화 보고 귀여워할지도 모르겠네. 허나 로맨틱 코미디로써나 음악 영화로써 매력이 없다는 것. 그리고 대니 보일의 연출작으로써도 영 대니 보일 스럽지 않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다. 이거 그냥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비틀즈 노래 완창으로만 채웠어도 중간은 가는 기획이었을 텐데 대체 왜 이렇게 나온 거지? 정말 생각할수록 의문이다.

덧글

  • DAIN 2019/09/28 19:55 # 답글

    처음부터 큰 목표가 있었다기 보단 그냥 “그 사람”이 안 죽고 살아있는, 그리고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던 팬의 팬픽션 같은 영화였습니다. 그 사람이 나올 때 어떤 아줌마의 헉 소리가 극장에서 인상적이었네요. ㅎㅎ 잘난 인간은 뭘 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그러니 연예인 걱정말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라~라는 것이었을지도요. ㅎㅎ
  • CINEKOON 2019/09/29 16:28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억지로 두 시간짜리 영화 만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로그온티어 2019/09/28 23:06 # 답글

    결국 덧글 길어져서 땜에 그냥 따로 트랙백 합니다 (...)
    말했지만 제가 트랙백하는 건 반박이 아니에요. 영감을 받아서죠.
  • CINEKOON 2019/09/29 16:28 #

    반박도 그렇지만 새로운 영감은 늘 환영이죠
  • 로그온티어 2019/09/29 19:43 #

    쓰다 취소했습니다.
    쓰다보니 뻔해져서 이젠 농담패턴을 바꿔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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