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 16:02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극장전 (신작)


타란티노를 좋아한다. 왕년의 가이 리치와 매튜 본을 연상케하되 그들에 비하면 좀 더 원조격인 그 키치하고 재기발랄한 연출 스타일. 그리고 영화와 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메타 발언, 유혈이 낭자하고 떨어진 살점들이 난무하는데도 그것을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웃어제끼는 유머. 여기에 정말이지 잘 쓴 대사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는 대사 작법까지. 나로서는 타란티노를 좋아하지 않기 어렵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 지금까지 타란티노가 나의 '내 취향'이라는 탑을 쌓는데 기여한 바가 얼마인데. 그 보잘 것 없는 탑의 주춧돌 세울 때 후원금 팍팍 낸 기업가가 바로 타란티노 선생이시란 말씀.

그런 나조차도, 타란티노의 역대 영화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그 중 하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킬 빌>과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장고 - 분노의 추적자> 등으로 대표되는 유혈난무 대중영화 팩이 그 첫째고 바로 난 그 집단을 좋아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펄프 픽션>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플롯 장난질 팩. 물론 반대 의견도 있을 것이다. 아니, 뭐 <펄프 픽션>엔 유혈낭자 유머가 없나? <킬 빌>과 <바스터즈>엔 플롯 순서 뒤섞는 구성이 없나? 물론 다 있다. 그래도 한 감독의 영화들인데 그 정도의 공통성은 있지. 하지만 그 두가지 속성 중 무엇에 더 힘을 주고 우선 순위로 생각했느냐가 나의 구분 척도가 되겠다. 그리고 타란티노 팬이랍시고 하는 말로는 좀 웃기지만, 난 <펄프 픽션> 그렇게까진 안 좋아하거든. 그리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바로 그 <펄프 픽션>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다.

<펄프 픽션>과 가장 비슷한 포인트는, 이야기의 세부적 순서인 플롯이 살짝 섞여있다는 것. 그리고 영화의 극후반부까지도 별다른 사건이 없다는 것. 이 정도일 것 같다. 어린 시절 <펄프 픽션> 처음 봤을 때 내가 재미없게 본 이유가 바로 그거거든.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별 큰 사건도 없는데 단순히 이야기 섞었다 해서 이 정도로 큰 영화가 된 건가- 싶었었지. 물론 그 자체로써도 대단한 성취이긴 했지마는. 하여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도 별 사건이 없다.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영화인데 마지막 20분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시간 넘는 런닝타임 동안 영화는 그저 두 남자의 이야기를 잔잔히 따라가기만 할 뿐.

물론 타란티노의 재능이 거기서 발휘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쓸데 없는 대화들에서도 이상스런 웃음과 긴장을 유발하는 그 센스. 탁월하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비록 별 일 일어나지 않았지만, 영화 중반부 브래드 피트의 클리프 부스가 히피촌 가서 긴장 빠는 장면은 보는내내 오금이 저렸다. 저 인간 저기서 깨터지면 어쩌나- 하고. 그건 장면 내에서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센스도 좋았지만, 더불어 관객들을 클리프 부스라는 캐릭터에 완전한 감정이입 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는 이야기겠지. 그리고 그 시퀀스 마지막에 후려갈겨주는 맹렬하고 통렬한 한 방. 이 정도면 연출을 존나 잘한 거다.

다만 이에 비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릭 달튼 스토리는 좀 진부하고 지루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가진 메타 이미지를 영화에 그대로 투영해내 유머를 만드는 방식도 좋고, 일종의 '타란티노가 영화를 대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극중극 서부 영화 촬영장면도 흥미롭다. 하지만 기존의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들이 가진 긴장감과 쾌감은 그다지. 엄밀히 따지면 '흥미'와 '재미'는 비슷하면서도 결국 다른 개념이니까. 릭 달튼 스토리라인은 분명 흥미롭지만, 결코 재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포인트는 결국, 마고 로비가 연기한 샤론 테이트였을 거라고 본다. 실제로 있었던 비극적인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온통 가십의 한 종류로써만 소비되어진 사람. 그렇다. 샤론 테이트를 떠올릴 때, 우리는 대개 '영화인'으로서의 샤론 테이트보다는 '희생자'로서의 샤론 테이트를 우선시했다. 그녀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살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이들 떠들었지만, 그녀가 생전 어떤 영화에 출연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금세 잊었다. 당장 나로서도 잘 모르니까. 그리고 타란티노는 바로 그 '영화인으로서의 샤론 테이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관객들 사이에 몰래 앉아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며 조용히 함박웃음을 지었던 여자. 아니, 여자 말고 그 배우. 희생자 말고 그 배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극중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릭 달튼이 출연한 영화들을 보여줄 때에는 옛날 고전 영화의 프레임 속에 현재의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합성해 집어넣는 방식을 썼다. 하지만 샤론 테이트가 실제로 출연했던 영화들에 한해서는 그러한 방식을 쓰지 않았다. 이미 프레임에 각인된 샤론 테이트를 파내 그 자리에 마고 로비를 집어넣는 방식을 쓰지 않았다. 바로 그렇게, 타란티노는 영화인 샤론 테이트를 우리에게 모셔왔다.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타란티노의 면모가 폭발하는 건 영화의 최후반부다. 실제 역사에서, 그 살인자들은 샤론 테이트를 잔인하게 죽였다. 허나 영화에서는, 디카프리오의 릭 달튼과 브래드 피트의 클리프 부스, 그리고 우리에게 '기왕 개를 키울 거라면 큰 개를 키우자'란 교훈을 주는 브랜디가 그들을 잔인하게 죽인다. 아니, 죽인다-라는 단순한 표현보다는 그야말로 혼구녕 내준다- 라는 다소 유치한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렇게, 타란티노는 영화인으로서 그 살인자들에게 복수한다. <바스터즈>에서 히틀러를 죽여버렸던 방식으로. 고증 대신 쾌감을 택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그렇게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타란티노의 골수 팬으로서, 이번 영화에 온전히 만족하지는 못했다. 허나 그럼에도, 이 영화를 통해 역시 타란티노가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인인가-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맞아. 복수는 이렇게 하는 거다. 영화인을 죽인 살인자들에게 해줄 복수는 이렇게 영화로 하는 것이 응당하다. 이번에도 타란티노는 '복수'를 했다. 대신 'Revenge'가 아니라 'Avenge'였다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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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09/29 21:32 # 답글

    이글루스가 페이스북이었다면 이 글에 좋아요를 눌렀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랐을 거에요, 너무 좋은 리뷰라서.
  • CINEKOON 2019/10/06 16:39 #

    그렇다면 저도 이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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