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6 17:08

후드, 2018 대여점 (구작)


우리가 아는 로빈 후드만 해도 벌써 서너명이 훨씬 넘어가지 않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케빈 코스트너의 얼굴을 한 로빈 후드란 의적. 그리고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을 러셀 크로우 얼굴의 혁명 장군. 여기에 여우 얼굴을 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로빈도 있으니 말 다 했다. 

때문에 이 구태의연한 의적 이야기를 다시 영화화하기 위해선 색다른 컨셉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작진은 바로 그 컨셉을 '현대화'로 잡은 듯 하다. 개봉 전에 이 영화 스틸컷을 몇 장 본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난 이 영화를 현대를 배경으로한 재해석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주인공 테런 에저튼이 방탄 조끼 비스무리한 걸 입고 있는 스틸컷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음. 때문에 난 BBC 드라마 <셜록>처럼, 중세 로빈 후드의 전설을 현대로 이식한 작품일 줄 알았지. 근데 그것까진 아니었다는 거. 다만 그래도 영화의 주된 컨셉이 현대화였던 것은 사실인 듯 싶다.

영화 초반부에, 주인공 로빈이 십자군으로 징집되어 아라비아 반도에서 전투를 벌이는 묘사가 있다. 근데 영화의 전체적인 컨셉이 현대화이다 보니, 묘하게 이 전투 장면이 <블랙 호크 다운>처럼 중동을 배경으로한 현대전처럼 보이더라. 약간 이라크 전쟁을 다룬 영화 분위기라고 해야하나? 주인공은 콤팩트한 디자인의 방탄 조끼를 입고 있고, 여기에 배경은 흙먼지 휘날리는 중동이다보니 이라크 전쟁처럼 보이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재밌는 건 인물들이 사용하는 무기가 소총이 아닌 활이라는 점. 바로 그 점이 좋았다. 고주몽의 후예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난 활과 화살 쓰는 캐릭터들을 좋아하거든. 그래서 다들 무시해도 난 꿋꿋이 MCU의 호크아이를 좋아했고, 영화 <최종병기 활>의 컨셉도 좋아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나의 취향을 이 영화가 잘 간파하고 있더라. 그 장면에서 제이미 폭스가 공중에 뜬 상태로 화살 재장전하고 바로 쏘는 거 보고 활뽕 겁나게 맞음.

이어서 활과 화살을 주 무기로 쓰는 주인공답게 여러 액션들을 보여준다. 뭐, 그 자체로 아주 신선하거나 다양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또 불만족할 수준은 아닌 것 같던데. 말그대로 속사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화살 여러개 들고 초당 여러개 화살 난사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개간지. 쏜지도 모르고 그저 팔 휘적거리는 건 줄 알았는데 정신차려보면 이미 적들의 몸에 화살 여러개 박혀있는 그 간지. 또 속사 외에도 중간에 시체에 박힌 화살 재활용하는 거라든지, 상황 여의치 않으니 발로 화살 쏴 제끼는 거라든지 재밌는 거 많음.

반면에 이야기는 역시나 구태의연한데, 존나 웃긴 건 영화가 제일 많이 참고한 것 같은게 기존 로빈 후드 영화들이 아니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인 것 같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자체가 의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수퍼히어로로서의 아이덴티티가 더 강한 인물이다 보니 그런 것 같은데,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많이 비슷하다. 일단 주인공이 귀족 출신이고 돈이 많은 부자인데다, 그 부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그저 더 큰 대의를 위한 포커페이스로 이용한다는 점. 브루스 웨인의 정신적 스승이자 조력자라고 할 수 있을 알프레드 격 인물이 이 영화에서 제이미 폭스의 얼굴로 존재한다는 점. 대저택을 베이스로 삼는다는 점과 사랑하는 여자가 있지만 주인공이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다른 남자가 나중에 얼굴 반쪽을 잃는다는 점 <배트맨 비긴즈> 속 빈민가로 내로우스가 설정되어 있던 것처럼, 이번 영화엔 빈민가로 탄광촌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 심지어 그 영화의 내로우스나 이 영화의 탄광촌이나 프로덕션 디자인도 좀 비슷하고. 추격씬도 비슷한데 <배트맨 비긴즈>에서 경찰들을 따돌리기 위해 배트맨이 지붕 위로 배트모빌을 끌고 다녔었지, 아마? 이 영화에선 로빈이 검은 말을 타고 탄광촌의 고지대에서 벌이는 추격씬이 있다. 톤 앤 매너가 좀 많이 비슷함. 여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가면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주인공의 대사들까지...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배트맨 비긴즈> 겁나 참조한 것 같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감화 되며 동네 이곳 저곳에 혁명의 상징으로 후드를 걸어놓는 것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분필 박쥐 표식과 비슷하기도.

하여튼 생각했던 것보다는 꽤 나쁘지 않은 영화인데, 막판에 갑자기 급격히 무너진다. 한껏 멋을 부리던 최종 보스는 순식간에 털린채 밧줄에 매달려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고, 여러 엑스트라들이 붙어 난전을 벌이는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안 좋은 것까지 따라 배웠는지 <다크 나이트 라이즈> 막판 클라이막스의 허접한 난투 연출을 연상케한다. 구체적 동선이나 배우들의 연기도 이상하더라. 옆에선 사람들이 얻어맞고 있는데 정작 주인공은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씀. 심지어 바로 옆에 주인공이 있어도 적들 역시 신경 안 쓰고... 결말도 급 결말. 후속편을 상정하고 서둘러 끝낸 느낌이긴 한데, 다 보고 찾아보니 월드와이드 흥행도 폭망 수준이라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테런 에저튼과 제이미 폭스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 없지만, 역시 품위있는 귀족 악당 전문 배우인 벤 멘델슨이 멋지다.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너무 악역으로만 소비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좀 그렇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은 느낌. 어째 캐릭터가 <로그 원>의 그것과 좀 비슷한 건 문제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영화다. 딱 적당한 킬링타임 영화. 좀 더 막판 액션에 몰빵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질 못한 것 같아 아쉬움. 

덧글

  • 포스21 2019/10/06 17:48 # 답글

    악평에 비하면 그나마 좀 나은 모양이네요. 케이블 같은 걸로 나오면 봐야 겠습니다.
  • CINEKOON 2019/10/12 19:22 #

    딱 그 정도의 영화는 됩니다
  • bullgorm 2019/10/07 01:27 # 답글

    배트맨 이전에 쾌걸 조로가 있었지요
  • CINEKOON 2019/10/12 19:22 #

    심지어 브루스 웨인도 조로를 보다가 부모를 잃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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