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0 19:19

펄프 픽션, 1994 대여점 (구작)


운명보다 인연의 힘을 믿는다. '애초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있다'라고 말하는 운명은 낭만적이지만, '엄청난 확률로 만난 우리' 되는 인연의 애처로운 힘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생각한다. 세상만사 모두 운명만으로 굴러가는 거라면, 우리들의 만남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될테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도, 운명이란 작동 방식에 의하면 우린 언제 어디서고 다시 만났을테니까. 허나 인연은 다르다. 인연은 결과론적인 해석을 가미할수록 힘이 배가 된다. 지금 이곳에서 만난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는지를 거꾸로 거슬러 천천히 계산하다 보면 엄청난 경우의 수가 쏟아져 나올테니까. 그리고 바로 인연의 기묘한 작동 방식을, 영화가 존나 괴랄하고 허무하게 묘사한다.


묘수는 플롯 장난질이다. 운명론자가 아닌 인연주의자로서, 영화는 삶의 허무한 면모를 플롯 순서 뒤바꾼 것만으로 표현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던지는 말들은 얼마나 가볍고도 무거운지. 서로 죽고 죽일 사람들의 관계는 부모의 원수나 일평생의 라이벌 같은 거창한 것으로 맺어지는 아니라, 그저 순간 자리에 있어서일 뿐이라는 허무한 진리. 영화만 놓고보면 그냥 타란티노의 재미난 분탕질처럼 보이지만, 막상 요리조리 뜯어보면 잔인하도록 허무한 세상만사 일들을 그려내고 있는 같아 많이 씁쓸.


대표적인 상술했지만 바로 브루스 윌리스의 '부치' 트라볼타의 '빈센트' 관계다. 부치는 빈센트를 죽인다. 빈센트는 부치의 손에 죽는다. 근데 사실 둘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거든. 서로 적도 밖에 없고, 번도 모두 십초에 불과했던 만남들이었다. 근데 둘은 서로를 죽이고 죽는다. 이게 삶이지. 세상엔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도 많지만, 묻지마 살인이나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테러 그냥 마구 이뤄지는 살인도 많잖아. 그래서 때론 허무하고. 부치와 빈센트의 관계가 그렇다. , 그리고 가지 . 일견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빈센트의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그가 부치의 손에 죽을 빈센트는 그저 이런 종류의 액션 영화에 흔히 나오는 조직원 엑스트라 1 불과했을 것이다. 그저 죽기 위해 등장하는 그런 배역으로. 허나 우리는 그가 죽을 , 그의 생전 모습들을 안다. 이후 뒤바뀐 순서 탓에 이미 죽은 그가 프레임 안에 다시 나올 때도, 우리는 그의 죽은 모습을 안다. 그게 존나 뒷통수를 후려치는 느낌이다. 숱한 액션 영화들에서 주인공에 의해 학살 당하는 엑스트라 악당들도 모두 저마다의 이런 인생사들을 갖고 있겠지. 바로 점이 존나 쎄함.


영화를 보며 떠오른 생각들은 이렇듯 무궁무진하지만, 정작 영화는 그저 그렇다. 타란티노 특유의 대사 말맛도 좋고 단기간에 복수의 감정을 응축했다가 일거에 풀어버리며 쾌감을 주는 연출도 좋지만, 그가 이후에 만들 영화들에 비하면 아직까진 새발의 피였다- 라는 느낌. 물론 영화의 성공이 아니었다면 이후의 타란티노는 존재하지 못했을 테니 자체로 의미가 없는 작품은 아니지만. 하여튼 취향은 보다는 나중에 나올 <바스터즈> <장고>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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