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필요 없고, 이건 세상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극중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주인공에게 묻는다. "뭐가 좋아 그렇게 웃냐"고. 여기에 주인공의 대답은 중반부까진 "죄송해요, 병이 있어서요"이고, 그 이후부터 결말까지는 "재밌는 농담이 생각나서"로 바뀐다. 그렇다. 이것은 세상을 무의미하고 병적인 것으로 보던 남자가 생각을 바꿔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농담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폭발적인 흥행세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에서 타낸 최고상 황금사자상. 그 모두를 가능케했던 것은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도 한 몫 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지분은 바로 그 기획력이다. 그리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장르 영화 팬으로서 이 영화에 느끼는 아쉬운 지점들 역시도 모두 바로 그 기획력에서 파생된다는 것. 이 정도면 영화 자체가 조커 같기도 하고.
일단 마블이 할 수 없는 방식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 망작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실패를 뛰어넘어 제대로된 피카레스크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이런 부분에서의 기획력은 확실히 좋다. 물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충분히 이해한다. 이거 그냥 독립 영화계에선 흔해 빠진 소재와 전개 아니냐는 거지. 거기다가 그냥 게임 스킨 씌우듯 DC 수퍼히어로물 스킨 씌운 것 아니냐고. 그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사회로부터 소외 받아 살인마로 각성하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영화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니. 그리고 단순 수퍼히어로물 스킨 씌운 것 같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되고. 허나 그 자체를 뭐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기존에 존재하는 유명 IP를 섞어 뻔한 영화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게 기획팀이 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기획이라고 해서 항상 성공할 수만은 없다. 근데 이 영화는 성공했잖아. 그러니까 인정할 건 인정해야한다는 거지.
다만 장르 영화 팬으로서의 아쉬움 역시도 상술했듯 그 '기획'에서 드러난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이야기한 적 있었는데, 나는 <다크 나이트>나 <로건> 같은 영화들이 좀 치사하다고 생각하거든. 물론 영화적 완성도는 뛰어나고 나 역시도 좋아하는 작품들이지만, 그 영화들은 왠지 스스로가 수퍼히어로 장르 임을 부인하고 거기서부터 멀어짐으로써 존재감을 발하는 영화들 같았거든. 그래서 좋았지만 얄미웠다는 거. 그리고 이번 영화 <조커>가 바로 그 아쉬움을 답습한다. 사실 이거 꼭 그 고담의 광대가 아니여도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거든. 물론 그랬으면 별로 안 팔렸을 거고 그걸 그렇게 포장해 제대로 팔리게 만든 기획력도 대단한 거 맞는데, 여튼 장르 영화 팬으로서는 좀 애매모호 했던 거지. 특히 다른 캐릭터도 아니고 조커잖아! 그동안 조커의 탄생 기원에 대해서 일절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만, 굳이 이렇게 구구절절 사연까지 팔아가면서 오리진 스토리를 만들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리송하다. 조커는 그 자체로 카오스를 설파하는 카오스 아니었던가. 그래서 매력있었던 거 아닌가. 근데 이 영화는 그냥 조커를 인간 세계로 끌어내린 것 같다. 카리스마 넘치는 장난과 광기의 신이 아니라, 그냥 얘도 사연있는 애였어-라는 식의 자기 변명을 지껄이는 세속적 인간으로 탈바꿈한 느낌.
그러나 그 기획력의 장단점을 걷어내고 보아도 썩 훌륭한 영화다. 우라질 소리가 절로 나오는 나쁜 놈인데 그 나쁜 놈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만든 뚝심이 대단함. 주인공인 아서 플렉이 영화 내내 계속 나온다. 그가 배제되는 씬이 별로 없다. 딱 하나 있는데, 그 씬에 대해서는 마지막 문단에 이야기해야지.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인물의 궤적을 따라가는 영화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캐릭터 스터디가 필요했던 영화였는데 그걸 또 호아킨 피닉스가 존나 잘 따먹음.
영화는 얕은 심도의 촬영과 블러 처리로 아서 플렉이란 남자와 세상을 따로 분리하고 유리해낸다. 아, 이것은 세상에 속하지 못하는 어느 한 남자의 모습을 시각화한 연출이로군. 그렇다면 보통, 이런 연출은 후반부로 갈수록 옅어지기 마련이다. 대개의 이런 영화들은 주인공이 세상과 어울리는 존재가 되며 끝나기 마련이니까. 허나 이 영화는 끝까지 이 연출을 유지한다. 그리고 유지되는 그 연출의 전제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던 남자가 나중엔 세상으로부터 가장 주목 받기에 오히려 세상과 유리되는 것이다.
알고보니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것이 젊은 날의 조커였다는, 그래서 그 둘은 서로가 서로의 창조주였다는 팀 버튼의 재해석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것은 그냥 이름 없는 어느 한 범죄자일 뿐이라는 원작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해석 역시 애호한다. 전자는 아이러니에 아이러니를 더한 그리스 비극 같은 신화적 감흥을 주고, 후자는 배트맨이 복수할 구체적 대상이 증발되었기에 그의 증오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
때문에, 그 둘의 절충안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관점은 흥미롭다.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죽인 것은 어느 이름 없는 남자지만, 그 남자의 행동을 촉발시킨 것은 조커라는 절충안. 그래서 원작과 배트맨의 팬 입장에서 가장 재밌는 연출은 영화의 최후반부가 된다. 아서에게, 아니 조커에게 누군가가 또 묻는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재밌는 농담이 하나 생각나서"라고 조커가 이야기할 때, 편집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후미진 골목길 한 가운데에서 부모를 잃은채 망연자실해 있는 한 꼬마 아이의 이미지다. 맞다. 이것은 조커 스스로에게 최고의 농담이다. 본인 스스로가, 스스로의 가장 큰 적을 창조하는 데에 일조 했다는 농담. 그렇게 둘은 죽을 때까지 영원토록, 달밤에 악마와 춤을 출 것이다.
덧글
로그온티어 2019/10/12 20:06 # 답글
생각해보면 최근 DC버티고 관련 영화들 보면, 진지한 범죄드라마처럼 보여서 저게 DC코믹스 영화인가 싶은 영화들도 많이 나오던데, 아무래도 DCCU의 신 트렌드는 범죄스릴러(그것도 느와르 중에 느와르)인가 봅니다. 밤의 가로등 불빛을 가장 맛깔나게 잘 찍는 맷 리브스 감독 부른 것 보면 확실합니다. 맷 리브스 분이 연출한 작품 속 가로등 불빛 아래 인간상들은 쓸쓸함이 더욱 배가되기 때문에, 배트맨과 조커는 달밤이 아니라 주황 가로등 빛 아래서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진짜 젭라 그놈의 주황 가로등 불빛... 혹성탈출에도 나오는 거보고 기가 질렸는데
포스21 2019/10/12 20:42 #
로그온티어 2019/10/12 21:01 #
CINEKOON 2019/10/26 13:41 #
로그온티어 2019/10/26 13: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