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3 17:42

조디악, 2007 대여점 (구작)


살인마가 나타났다. 한 명만 죽인 게 아니라 여러명을 죽였다. 연쇄 살인마다. 거기에 스스로를 조디악 킬러라고 부르며 우상화 한다. 언론과의 접촉을 즐겼고 수사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도 그 모든 걸 게임으로 생각했다. 그를 따라하며 조디악 킬러가 되기를 자청하는 일종의 추종 범죄자들도 늘어났다. 근데 제일 중요한 건 안 잡혔다. 끝까지 안 잡혔다. 존재감도 활활 타오르다 갑자기 꺼진 게 아니라, 조금씩 누그러지며 옅어졌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안 잡혔다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실화라는 거다. 

이런 이야기가 있을 때, 제작진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장르가 스릴러에 소재가 연쇄 살인인데, 결말에서 범인을 특정할 수가 없다. 워낙 유명했던 실화라 극적 타협으로 범인을 재창조 해내기도 어렵다. 당연히 각본가 입장에선 쓰기 어렵고, 제작 투자자 입장에서는 투자하기 어렵지. 허나 데이비드 핀쳐는 오히려 바로 그러한 점에 끌렸던 것 같다.

영화는 어떤 일에 자기 인생을 죄다 갖다바친 남자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살인의 추억> 속 박두만이 그랬고, <제로 다크 서티> 속 마야도 그랬다. 다만 전자는 끝내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채 이미 지나가버린 회한을 가만히 응시하는 쪽이었고, 후자는 목표를 달성 했으나 오히려 그 성공이 자신에게 선물한 허망함을 앓는 쪽이었지. 그에 반해 <조디악>의 로버트는 일종의 목표 달성을 했음에도 그냥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실제 범인을 검거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입장에서는 진범의 모습을 보았다고 확신 했었으니까. 하여튼 봉준호와 캐서린 비글로우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핀쳐는 <조디악>을 통해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다 바쳤던 사람들'이 바로 그 '무언가'가 완성되거나 해결되는 순간 보여주는 일순간의 멍한 표정을 오롯이 보여준다는 이야기.

핀쳐의 <세븐>을 처음 본 건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1995년도 영화였지만 1991년생인 내가 그걸 개봉 당시 볼 수 있었을 리는 없고. 하여튼 그 영화를 보고나서 생각했었다.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지금 당장 은퇴해도 여한이 없겠다'하고. '감독은 지금 아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겠지?'라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네. 문제는 그 이후 데이비드 핀처가 만든 게 <조디악>이었다는 것이다. <세븐> 찍고 은퇴가 웬말이야, <조디악> 같은 영화 만들 거였다면 더 열심히 하는 게 맞지.

<세븐>이 천재의 영화라면, <조디악>은 장인의 영화다. 봉준호의 말마따나 <조디악> 때의 핀처에 비하면 <세븐> 때의 핀처는 그저 똥 싸는 유치원생에 불과할 뿐이다. 능숙하게 짜여진 편집의 리듬감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불길한 긴장감. 철저하게 세팅된 톤 앤 매너. 핀처에겐 그렇게 더 가질 세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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