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31 21:23

녹터널 애니멀스, 2017 대여점 (구작)


성격 차이로 갈라섰다기엔 그 모든 것이 에드워드가 느끼기에 너무 잔혹했다. 언제나 그의 꿈을 응원해줄 거라 믿었던 그녀는 냉정하고 뾰족한 평가로 에드워드의 소설을 갈기갈기 찢어댔고, 함께 일구고 꾸려나가자던 왜소하고 얇은 집에 대한 약속은 지갑 두껍고 얼굴 낯은 더 두꺼운 바람둥이에 의해 무너졌다. 제 아무리 양보해 아내가 바람나 이혼했다고 스스로의 자존심을 갈구해봐도, 결국 그 끝의 치명상은 그녀가 멋대로 낙태해 지운 나의 아이 때문 아니었던가. 이쯤 되면 장르 영화인데도 에드워드가 수잔을 칼로 안 찔러 죽인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러나 칼 대신 정성껏, 그리고 한(恨)껏 써낸 소설을 통해 에드워드는 수잔에게 복수한다. 나의 입장에서 쓴, 그리고 내가 당했던 일들에 대해서 쓴 소설을 그녀에게 선물한다. 그녀는 그의 귀기가 서려있는 것도 모른채 소설을 읽고, 독자로서 너무도 당연히 주인공에게 몰입한다. 아-, 그 때 그가 느꼈던 감정과 상처는 이런 것이었군.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직접 만나 내가 그 아린 마음을 어루만져주어야지. 허나 어림도 없지. 그는 약속 장소에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녀 자신에 대한 혐오감만을 한껏 부추겨 놓고, 끝내 그걸 해소해주지 않았다. 존나 작가다운 복수라 말할 수 밖에.

외도에 낙태까지. 에드워드가 수잔을 미워할 만한 이유는 세고 셌지만, 그럼에도 그것 때문에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썼을 소설로 복수를 준비했다는 것. 에드워드의 그 계획은 짐짓 무모해보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소 찌질해 보이기도 한다. 나야 충분히 해볼만한 복수였다- 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몇몇 관객들은 좀 많이 나간 것 같다고 불평하더라. 뭐,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그럼에도 그 계획의 크기를 차치하고 본다면, 존나 세련되고 멋진 복수인 것은 맞다. 자신의 직업이자 꿈이었던 것으로 과거 그 직업에 대한 꿈을 짓밟았던 사람에게 날리는 강력한 어퍼컷. 작가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집필할만큼 충분한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하여튼 작가라는 게 본질적으로는 텍스트로만 자신을 표현하는 직업인 건데, 바로 그 점에서도 이 복수는 충분히 아름답다.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우편으로 보낸 소설 원고랑 이메일 한 통으로 다 완성한 거잖아. 그야말로 오직 텍스트로만 구성된 복수.

독서의 매커니즘을 신비롭게 해부하는 영화이기도.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너무도 당연히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그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 사실적인 탄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 얼굴에 상상을 더한다. 보통은 친구나 가족, 지인 등 주변 인물들의 얼굴로 상정하거나 아니면 그냥 배우나 가수 등 연예인으로 하는 경우가 많겠지. 이 영화 속 수잔의 경우엔 전자였다.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인 토니의 얼굴로 자신의 전 남편 에드워드를 선택한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남자니까, 그리고 소설을 쓴 사람이 에드워드니까 당연한 거겠지. 이에 덩달아 소설 속 토니 아내의 외모가 암만 봐도 수잔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역시 어쩌면 필연일 것이다.

외도와 이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살인과 추적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점도 재미있다. 에드워드에겐 수잔의 말 하나 하나가 모두 총알 한 발 한 발과도 같았으리라. 대놓고 간통 로맨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잔이 더 젖어든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에 그 짓거리 하고도 에드워드 다시 만나러 그 중국집 갔던 거지.

이 영화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 '톰 포드 재수 없어.'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고. 디자이너면 옷만 잘 만들면 될 것이지, 뭣하러 영화까지 잘 만드는 거냐고. 암만 생각해도 그건 재수 없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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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10/31 23:23 # 답글

    또 트랙백해야 겠습니다. 미안해요
  • CINEKOON 2019/12/03 10:43 #

    아니예요. 길어서 더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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