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31 21:46

판소리 복서 극장전 (신작)


포스터와 제목만 보곤, 신비로운 자신만의 비기로 개나 소나 다 줘패고 그걸로 권투계 접수하는 스포츠 영화인 줄 알았다. 자진모리 장단이나 휘몰이 장단을 타며 리듬감 넘치는 잽과 훅으로 사각의 링 제패하는 영화인 줄 알았다고. 막상 보니 그런 영화는 아니었던 걸로. 기대했던 것처럼 화려한 액션과 신비로운 잔기술로 승부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는 그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덩달아 떠내려 가는 것들을 나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판소리와 복싱이 비주류 문화라고 이야기 하면, 아마 국악협회와 권투협회에서 현피 제안 들어오겠지. 허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 주변 사람들 중 판소리와 복싱 둘 중 하나라도 하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이미 영화가 말하고 있듯, 소리꾼들은 사라졌고 복서들은 UFC 등의 이종격투기에 밀려난 실정인데.

영화는 판소리와 복싱을 쌍두마차로, 시간과 시대의 흐름에 잊혀지고 무뎌지고 또 버려진 것들을 추억한다. 거기엔 사람들이 더 이상 필름 카메라를 쓰지 않아 문을 닫게된 낡은 필름 현상소가 있고, 이젠 공장에서 생산하지 않아 고장나도 부품 수리비가 더 드는 브라운관 TV, 재개발에 밀려 사라지는 오래된 동네, 누군가에게 버려진 유기견, 그리고 나이 들고 병이 든 할머니가 있다. <판소리 복서>는 나름의 호흡과 리듬으로 그 오래된 것들을 조금씩 보듬는 영화다.

그런데 그 특유의 호흡이 다소 느리다는 건 감상자에 따라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종종 실소 35% + 현웃 65% 정도의 애매한 비율을 가진 유머들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그냥 풉-하며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어쨌거나 스포츠 영화의 탈을 쓰고 있는 건데, 바로 그 장르의 쾌감을 조금이라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꽤 치명적. 만드는 사람들이야, 원래 복싱이 메인인 영화가 아니다-라고 변명해봤자 어떡해. 이미 스포츠 영화처럼 마케팅 되었는 걸. 기대 포인트를 잘 못 잡았다고 관객을 혼낼 순 없는 것이다.

상술했듯 여러 단점들이 있는 영화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으려드는 주인공의 짠내 나는 모습에 살짝 뭉클함을 느낀 영화다. 대신 막판에 리얼 판소리 복싱 한 번만 존나 신나게 보여줬다면 더 좋았을 것을.

덧글

  • 로그온티어 2019/10/31 23:22 # 답글

    진지한 영화였군요! 전 제목때문에 이상한 조합으로 이상하게 웃기려는 영화인 줄 알았어요. 감성적인 영화라면 저렇게 제목 짜면 안 됩니다. 서정적으로 지어야죠. 옛날 영화 제목에도 예시 많잖아요.

    [저 소리에도 주먹이] 라던가
    [복서가 득음한 까닭은] 이나
    [복서여 판소리행 열차를 타라]
    [복서가 적벽가에 빠진 날]
    [고운 소리, 맑은 소리, 이상한 복서]
    [소리꾼의 주먹이 운다]
    [체육관 옆 서편제] ...
  • 이요 2019/11/01 09:09 #

    ㅋㅋㅋㅋ
  • 타마 2019/11/01 08:54 # 답글

    포스터처럼 잔상을 남기는 화려함은 없었나 보네요.
  • 리쿤 2019/11/01 14:29 # 답글

    포스터 참 어그로 잘 끌게 잘 만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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