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4 14:56

버티고 극장전 (신작)


고층 빌딩 속 회사 생활이라는 갑갑한 현실에서 고소공포증과 현기증에 시달리는 여자. 그리고 우연히 그 여자와 조우하게된 고층 빌딩 외벽 청소부 남자. 여기에 제목이 '버티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란 점에서 사소한 불만이 생기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설정에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설정은 현실적이면서 운명적이고, 제목은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잘 기획된 영화라는 거지.

근데 시발 설정과 제목만 좋으면 뭐하냐고. 영화는 결국 밑도 끝도 없이 슬픈 일기장 같다. 끝없는 자기연민의 늪 같은 영화. 얼마 전에 <벌새>를 보곤 비슷한 감상을 남겼었지. 테크닉과 스타일이 뻔한데, 거기에 내용을 작가의 회한만으로 꾹꾹 눌러담아 보는내내 지치는 느낌 같았다고. 나름 소신 발언이었다면 소신 발언이었다. 근데 이 영화도 똑같다. 아니, 어떻게 보면 <벌새>보다 더 해.

열려라, 스포 천국!

세상의 모든 불행이 주인공에게 달려든다. 눈치 보느라 바쁜 직장 생활, 잦은 야근과 회식, 매일 같이 걸려와 남탓 넋두리하기 바쁜 알콜 중독 엄마의 전화, 비밀스러웠던 사내연애의 실패, 동성 섹스에 따른 연인의 외도, 회사 내에 퍼진 자신의 섹스 동영상, 직장 상사의 성추행, 친한 동료의 재계약 실패, 여기에 현기증에 따른 구토와 보청기 착용까지.

'이 세상 너만 힘들게 사냐?'라고 주인공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게 아니다. 주인공이 불행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나, 관객으로서 최소한 그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지. 영화가 너무 피로하다. 관객들이 주인공에게 채 몰입하기도 전에 이 세상 모든 불행을 주인공에게 쏟아부어버리니, 이입하기도 전에 지친다. 타자화 되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게 너무 힘들다. 심지어 영화적 재미도 없어. 그렇게 되니 또 지루해지고 몰입이 더 안 돼. 이 악순환의 사이클.

주인공은 내내 수동적인 태도로 삶에 임한다. 상사가 하라는대로, 의사가 하라는대로, 친한 동생이 하라는대로, 남자친구가 하라는대로, 심지어는 삐뚤어지고 싶어 찾은 클럽에서도 다른 남자가 하라는대로. 이렇게 타인이 하라는대로 수동적인 삶을 살던 여자가, 영화 후반부에 자기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적인 성장 아니겠어? 그런데 주인공이 이 영화 결말부에 하는 유일한 선택이 무엇인가? 자살이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실패했으니 자살미수라고 해야할까. 어쨌거나 자살은 자살이다. 더 웃긴 건 자살만 해도 환장할 판인데 혼자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연탄 가스로 죽으려 했던 게 아니라는 거다. 수호천사 마니또처럼 자신을 지켜봐왔던 빌딩 외벽 청소부에게 가서, 외벽 청소용 트레이에 자신을 태워달라고 한다. 그리고 시발 거기서 떨어져. ............자살도 하면 안 되겠지만, 너가 거기서 그렇게 떨어져 죽어버리면 그 남자는 어떻게 되는 거냐......

다 떠나서, 영화적 재미가 전무하다. 사내 연애의 스릴감이나 멜로 드라마로써의 알콩달콩함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직장 생활을 다룬 영화로써도 영 뻔해서. 그냥 존나 힘들고 우울한 주인공의 브이로그 보는 기분이다. 아, 요즘 이런 영화가 왜 이렇게 많지.

덧글

  • 로그온티어 2019/11/04 21:13 # 답글

    전 버티고라서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 CINEKOON 2019/11/05 14:12 #

    남 덕에 막판 뒤집기로 버티긴 합니다
  • 나눔팁 2019/11/05 14:09 # 삭제 답글

    삶은 고통이다. 가끔 찾아오는 행복에 꾸역꾸역 이겨낼뿐, 여유 가지고 보세요.
  • CINEKOON 2019/11/05 14:13 #

    여유 갖고 보면 더 재밌어지는 영화인가요? 저 지금 여유로는 조태오인데;;
  • 로그온티어 2019/11/05 15:05 #

    블로거 이름 치곤 미묘하고 어투도 기계적이라고 생각해서 보니까... 교묘한 광고였군요.
    나눔팁이 사이트 명칭입니다
  • 타마 2019/11/05 16:31 # 답글

    요즘은 여성이 "나 힘들어 죽겠어!"라고 주장하는게 영화계의 트렌드 인 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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