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2 19:25

내 이름은 돌러마이트 극장전 (신작)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싶었다. 사람들 앞에서 농담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력도 운도 모두 떨어져 나간지 한참 뒤. 가수와 코미디언으로서 모두 실패한채 동네 LP 전문점에서 일하며 간간히 지루한 밤무대 진행을 도맡아 하고 있는 루디. 여전히 꿈 꾸는 자이지만, 경력란은 여전히 실패라는 낙인으로 가득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동네 노숙자에게서 희한한 면모를 발견해낸 루디는 도시 뒷골목에서 그들에게 보고 듣고 배워낸 이야기와 말투로 다시 재기하려 한다. 이왕 다시 시작하는 거, 깔끔하게 활동명도 새로 만드는 게 좋겠지. 루디 보다는 좀 더 터프해 보이는 이름, '돌러마이트'는 어떨까.

영화 초반에 그런 장면이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위 친구들에게 비웃음만 산 루디가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는 친구에게 말한다. '내 세상은 왜 이리 작은 걸까. 내가 일하는 저 LP 전문점도 그저 지나가는 장소 중 하나일 줄 알았어. 하지만 내 꼴을 봐, 지나가는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머물러 있는 장소라고.' 어쩌면 나는, 바로 그 장면에서부터 루디와 그를 연기하고 있는 에디 머피, 그리고 그걸 화면을 통해 보고 있는 나. 이 세 사람을 겹쳐 보았는지도 모른다. 

루디처럼 꼭 예술 계통에 꿈을 둔 자가 아니라하더라도, 누구나 그런 곳이 하나쯤 있었을 것이다.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돈'과 '생계'를 위해서 소속되어 있던 곳. 그런 자리. 루디에게는 그 곳이 오래된 동네 LP 전문점의 낡은 계산대 뒤였다. 그럼 에디 머피는? 한 때 엄청난 커리어로 승승장구했던 그이지만, 어쨌거나 2000년대 들어 찍었던 영화들은 <슈렉> 시리즈 정도를 제외하면 죄다 난장판이었잖아. 심지어 그 <슈렉> 시리즈도 3편부터는 내내 내리막이었다는 게 더 슬픔. 아, 물론 그렇다해도 <플루토 내쉬>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리고 마지막. 거기에 내가 있었다. 영화 해보겠답시고 영화 학교 졸업해 이 촬영장 저 촬영장 전전하는 동시에 먹고 산답시고 카페 아르바이트와 입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일했던 나. 물론 내 삶에 괜시리 비극성의 필터를 끼워 한국 독립 영화 감성으로 묘사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카페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커피를 내리는 일. 그리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둘 다 언젠가는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었던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는 동안 힘든 순간들, 귀찮은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일에 임하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동안은 즐겁게 보냈다. 허나, 그럼에도 그런 불안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난 여기 카페 계산대 뒤에 앉아 평생 커피만 내릴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 꿈을 뒤로 한채 남들의 꿈을 키워주는 강사 일만 주구장창 하다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인생엔 반드시 반전이 찾아온다-라는 말.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말은 인연 보다 운명을 믿는 자들의 주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운명 보다 인연을 믿는다. 루디는 훗날 성공할 운명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대성할 존재였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온 게 아니다. 루디는 그 기회를 만들어냈다. 너무 지나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매 순간을 사랑하며. 존나 뻔한 여름 방학 영화 감상문 숙제 같은 멘트지만,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하겠다. 기회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노래 가사, 그 중에서도 힙합의 랩 가사 같은 경우. 펀치라인과 라임이 중요한 장르이기 때문에 외국인 입장에서 자막을 통해 보는 경우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인데, 번역가가 태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사소하게 아쉬운 부분들 마저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말. 하여튼 그 때문에 영화 중반부까지, 루디가 '돌러마이트'라는 활동명으로 라임 쩔게 활동하는 모습. 거기에 온전히 편승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영화 보면서 '와, 진짜 쩌네!'라는 느낌으로 봤다기 보다는 그냥 '아, 영화 전개상 잘 되어가고 있는 중인가보다-'로 인식 했거든. 그러나 영화 중반부부터, 루디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농담 몇 줄이나 노래 몇 곡이 아니라, 장편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주변 인력들을 끌어모으고 또 총출동 시킨다.

어쩔 수 없게도 영화 밥을 좀 먹었다보니, 그 부분에서 이 영화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몇 달 전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영화 만드는 일은 저토록 항상 지지리궁상이지. 계획들은 틀어지기 마련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견고했던 벽은 토론인지 논쟁인지 아니면 그냥 막 싸움인지 모를 말들로 쉽게 조각나고 무너져 내리지. 보면 볼수록 영화 만드는 일은 정말 최악이라니까. 근데 난 왜 하고 있고, 넌 또 왜 하고 있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돌러마이트가 마지막 리무진 장면에서 준다. 스스로의 존재와 그 존재 가치에 대해서 절대로 , 절대로 폄하하지 말 것. 세상에 자기 편 하나 만들기 정말 힘든데,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나 스스로를 응원해주고 사랑 해줘야지 않겠나. 그리고 한 가지 더. 주위에 꿈 꾸는 자가 있다면, 절대로 그 꿈을 흔들지 말 것. 꿈꾸는 자들은 조금의 응원과 관심만 주어도 그것들을 자양분 삼아 쑥쑥 자랄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그 나무가 부디 꽃을 피울 수 있게 차분히 지켜봐줄 것. 그것만으로도 <내 이름은 돌러마이트>는 진짜 가치있는 영화다. 실화 속 주인공인 루디에게도, 그걸 연기한 에디 머피에게도, 그리고 그걸 지켜본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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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t;내 이름은 돌러마이트&gt;</a> (크레이그 브루어)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 그리고 그를 통해 자존감을 찾는 영화. 맞다. &lt;내 이름은 돌러마이트&gt;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이지만, 그 끝에 가서 주인공들이 얻는 것은 꿈이나 성공 같은 마냥 달콤한 것이 아니다.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스스로를 위하고 스스로를 사랑해줄 줄 아는 자존감이다. 그리고 예술에서야말로, 그 자존감이 가장 중요하다. 영화가 성공했든 성공하지 못했든, ... more

덧글

  • 로그온티어 2019/11/13 13:12 # 답글

    기회는 스스로 잡는다는 점에서 저는 제임스롤프가 생각납니다. 네, AVGN이요. 컬트B급 영화를 좋아하고, 그쪽으로 해박한 지식이 있는 리뷰어죠. 제가 매번 블로그에 쓰는 게 있어요. 그는 장난꾼이나 셀러브리티나 유튜버가 아니라, 실은 감독이라고요. 시네메서커를 보면 그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어떻게 살아왔는 지에 대해 볼 수 있었고, 저는 그 열정에 감탄했어요. 조악하지만 쉴틈없이 영화를 만드는 거요. 어렸을 때부터 그는 평생 단편 포함해 100편 이상을 만들었다고 해요. AVGN은 별개로 치고서라도.

    AVGN은 사실 그의 무수한 단편 중 하나였어요. 허나 그의 절친 친구인 마이크의 권유로 인해 인터넷에 올렸고, 그게 성공한 겁니다. 허나 이후 행보는 좀 그런게, 결국 롤프는 원하는 영화감독이나 영화일이라기 보다는 AVGN 제작자와 영화리뷰어에 얽매여 있게 되었거든요. 그마나 희망적인 것이라면, AVGN을 제작하면서 본인의 B급 성향, 호러 테이스트를 가미한다는 겁니다. 얼마전엔 롱테이크로 리뷰도 찍었고요.

    근데 사실 롤프가 이전에 만들었던 작품들은 재미가 없었어요. 블루홀이나 헤드 인시언트나... 실제로, 그가 AVGN 이전에 만든 나머지 단편들이 너무 조악하고 지루해요. (제 기준입니다만) 괄목할만한 작품은 AVGN 시리즈나 보드제임스밖에 없어요.

    결국 나는 뭔가를 계속 만드는 노력을 해야하지만, 내 자신을 탈피하거나 업그레이드 시키려면 만남도 중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내 작품을 잘 평가해줄 어떤 만남이 필요한 거죠. 어떻게 보면 그것도 운명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건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는 운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마음을 타인에게 열고 평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한 거고, 그게 또 소양이겠죠.
  • CINEKOON 2019/12/03 10:39 #

    예전에 AVGN이 괴수 영화들 리뷰하는 거 즐겨 봤었는데... 다시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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