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2 20:28

샤이닝, 1980 대여점 (구작)


장르 소설계의 리빙 레전드, 스티븐 킹. 그리고 영화계의 마지막 군주, 스탠리 큐브릭. 이 두 이름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에 광기 어린 연기로는 따라갈 자가 없을 잭 니콜슨까지. 여러모로 거장들의 거한 협업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의 영광은, 이미 많이 알려져있다시피 많은 불협화음 끝에 만들어진 것이다. 원작자인 스티븐 킹은 치를 떨며 싫어했다던 그 영화. 장르 소설계의 리빙 레전드가 공적인 자리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분노를 만천하에 공표 했던 바로 그 영화. 당대엔 그 이유가, 거의 원작 파괴 수준의 각색이었다는 점으로 설명되었다. 제목이 '샤이닝'임에도 정작 그 '샤이닝'이란 요소에 대해선 별다른 설명이 영화엔 없었기 때문이라는 거. 게다가 주인공이자 악역인 잭 토랜스 역시도 소설 후반부의 묘사와 영화 후반부의 묘사가 정반대이니 스티븐 킹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하겠다. 근데 이건 내가 어디서 들은 건데-, 그런 이유 말고도 영화사에서 이 영화 VHS 수입을 스티븐 킹에게 떼어주길 거부해서 스티븐 킹이 그렇게 싫어하는 거라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또 졸라 재밌는 트리비아네.

까놓고 이야기해보자. 이 영화는 잘 만든 영화인가? 개인적으로는 겁나 잘 만든 영화라고 본다. 연출적인 부분과 기술적인 부분, 어느 하나 모난 데가 없다. 철저한 세팅과 디테일로 만들어낸 오버룩 호텔 세트. 미술팀이 만들었을 그 세트의 미적인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촬영적인 부분에서 마저 거의 황홀한 퀄리티를 보여준다. 스테디캠 역사의 초창기에 만들어진 작품임에도 요즈음 영화들의 스테디캠 활용법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이치에 맞다. 여기서 그 이치라 함은, 그저 당시의 신기술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사치로 스테디캠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버룩 호텔의 아름다우면서도 스산한 분위기를 꽉꽉 눌러담고, 또 영화 전반부와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서서히 긴장감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스테디캠 때문 아니었겠는가. 이건 뭐, 왜 썼냐고 반문할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하여튼 미술도 좋고 촬영도 좋고. 여기에 편집이랑 연출은 더 좋고.

문제는 두번째. 잘 만든 영화인 거 알겠어. 그럼 호러 영화로써는 어때? 이게 존나 미묘한데, 일단 점프 스케어를 많이 쓰는 영화는 아니다. 깜짝 쇼로 관객을 괴롭히기 보다, 서서히 조이는 연출로 관객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려는 전략의 영화였다. 근데 문제는,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요즈음의 호러 영화들에 단련되어 있는 관객들은... 좀 싱겁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명색이 호러 영화인데 죽는 사람도 별로 없고, 장면의 대부분은 너무 밝다. 물론 이건 클리셰를 깼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함. 허나 안 무서운 건 안 무서운 거지. 엄청 무서운 영화는 아니다. 심지어 중후반부랑 결말부는 좀 웃기기도 하다. 나 이 영화 제대로 처음 본 게 아마 몇 해 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기획전 형식으로 틀어줬을 때일텐데 그 때도 겁나 웃으며 즐겁게 봤던 기억이 있음.

알고보니 오버룩 호텔은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었다. 삶에 지치고 치인 사람들을 하나둘씩 회유해 집어삼키고, 끝내는 타락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존나 악랄하게도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매개로 유혹하는 곳이었다. 잭 토랜스에겐 그것이 다름아닌 '술'이었다. 극 중 골드룸의 바에 혼자 앉은 잭이 나지막히 말하는 대사가 있다. '지금 술이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텐데'. 오버룩은 필시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잘 만든 영화인 것은 맞지만, 장르적 재미가 출중한 영화인가-에 대한 답은 쉽게 내려주기 어렵다. 허나 딱 한 가지 분명한 것. <샤이닝>은 존나 보면 볼수록 이상한 마력이 있는 영화라는 거. 볼 때마다 느낀다. 영화에 홀리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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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11/13 13:16 # 답글

    http://www.rottentomatoes.com/m/room_237_2012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0942

    이거 보셨나요? 재밌습니다. 추천해요. 샤이닝에 대한 괴담들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이거보고 나면 샤이닝이 또 달라보인다고 하고 그러더라고요. 솔직히 개인적으로 샤이닝 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 CINEKOON 2019/12/03 10:39 #

    자꾸 무서운 거 저한테 추천하지 마세요 진짜 ㅠㅠ
  • 로그온티어 2019/12/03 13:10 #

    깜짝 놀래키거나 잔인한 장면 나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설득력 있는 미스터리를 들으며 소름끼치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차피 보기도 어렵고 (...) 안 보실 것 같아서 미리 말합니다만, 여기서 재밌는 언급이 하나 있습니다. 샤이닝의 시작과 끝의 구도가 일치한다는 거요. 말하자면, 하나는 그냥 시작부터 틀어놓고, 하나는 끝부터 되감듯이 틀어놓고, 상영되고 있는 두 화면을 겹쳐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구도가 일치하게 된다는 썰이죠.

    정말 그런지 확인 안 해봤습니다만, 듣다보니 점점 더 괴이해져서 샤아닝 자체가 기이하게 비틀린 마굴(?)같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런 재미가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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