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여년 만에 돌아온 속편. 금의환향이란 이런 것이다.
전편이 스티븐 킹이라는 장르 소설계의 제왕과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영화계의 군주가 서로에게 칼을 겨눴던 싸움터였다면, 속편인 <닥터 슬립>은 그 둘 모두에게 보내는 헌사 같다. 싸움터가 아니라 평화 조약을 맺은 서명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 정도로 마이클 플레너건 감독은 큐브릭의 영화와 킹의 소설 모두를 적절히 포용해 아주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큐브릭의 전편과 마찬가지로, 호러 영화임에도 아주 무섭지는 않은 영화다. 보는내내 <샤이닝> 보다 <캐리>가 더 생각나더라. 어쩌면 스티븐 킹 유니버스로 한데 묶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획인데. 하여튼 <캐리> 뿐만 아니라 같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에서 <글래스>로 마무리되는 그 3부작이 떠오르기도 했음. 능력자 배틀물이라는 점에서는 그 시리즈와도 어떻게 엮어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그거 하나만은 꼭 이야기 해야되겠다. 크레딧을 보니 마이클 플레너건이 연출 뿐만 아니라 각본 각색과 편집에도 손을 댔던데. 솔직히 편집 템포가 아주 훌륭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임에도 어쨌거나 런닝타임을 좀 줄여 영화적 밀도를 좀 더 확보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교차편집을 위시한 몇몇 부분의 편집들은 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거든. 그렇지만 그 정도의 단점만 빼놓고 이야기한다면 나머지 연출이 너무 너무 훌륭하다.
영화는 결국 글을 이미지로 변환해내는 일이다.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이 있었고, 어쨌든 간에 각색 과정을 거쳐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겠지. 바로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연출이 정말 훌륭하다. '나라면 같은 글로 이런 시각화가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차분한 톤 앤 매너가 분위기를 잘 세워주고, 간간히 튀어나오는 환상 내지는 환각 장면들의 연출이 특이해 눈길을 끈다. 레베카 퍼거슨의 로즈가 아브라를 찾기 위해 대기권 너머에서 지구 표면을 검색하는 장면. 수퍼맨 영화가 아니고서야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로즈와 지구를 수평의 관계로 묘사해낼텐데, 플레너건은 여기서 굉장한 수직적 이미지로 불안함을 가중시킨다. 그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장면도 좋다. 로즈가 아브라의 방에 들어와 환상 대결하는 장면의 편집 타이밍과 촬영 만큼은 기가 막혔다. 존나 차분한 소름이라고 해야하나.
내용상 별 거 없어 보이지만 그 틈바구니로 주인공을 관객의 마음 속에 넣는 방법도 잘 알고 있는 영화다. 이완 맥그리거의 얼굴이야 뭐, 워낙 호감형이라 마음을 안 주기가 더 어렵지만. 그럼에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나름 근면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관객에게 부여주며 몰입력을 높인다. 더불어 주인공 주위 인물들에게도 마음 쓰이게 하고. 여기에 반대로, 악당 그룹인 트루낫의 멤버들은 더없이 냉정하게 묘사된다. 캐니스터에서 스팀 빼마시는 게 무서운 동시에 좀 웃기게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연출이 무척이나 잘 되어 있다. 그룹 멤버 중 하나가 운명을 달리할 때, 애도를 표하는 듯 멀찍이서 지켜보다가 시체에서 스팀이 빠져나오는 순간 짐승처럼 달려드는 순간의 묘사. 식인 같기도 하고 윤간 같기도 하고. 그 기괴하면서도 무서운 묘사가 참 좋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막판 30분. 영화는 전편의 망령이었던 오버룩 호텔을 직접적으로 소환함으로써 시리즈의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제대로된 팬 서비스를 선사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나 <터미네이터 - 제네시스>,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그것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리고 바로 이 시퀀스에서, 플레너건은 스탠리 큐브릭을 제대로 예우 해주는 동시에 전편에 대한 스티븐 킹의 불만을 열렬히 달래준다. '샤이닝'이라는 소재와 악령들과의 대결을 적극적으로 끌어옴으로써 스티븐 킹의 원작에 대한 존중, 그리고 전편이 해내지 못했던 것들을 일정 부분 설명 해낸다. 그리고 그 대결이 벌어지는 오버룩 호텔이란 무대를 너무 전편과 똑같이 재현해냈어. 거기서 큐브릭에 대한 존경도 보이는 거지. 듣기로는 워너 스튜디오 어딘가에 짱 박혀 있던 전편의 오버룩 호텔 세트 설계도를 찾아내 있는 그대로 다시 만들어낸 거라던데. 아주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역시 사람은 근성이 있어야 해. 뭔 소리야
영원한 오비완 케노비, 이완 맥그리거의 선량한 인상과 연기가 아주 좋다. 고전적 얼굴을 지닌 레베카 퍼거슨의 캐스팅도 정확했고. 다만 전편의 배우들을 그대로 승계하지 못했던 점은 아쉽다. 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잭 니콜슨 나이도 있고, 셜리 듀발도 은퇴 했으니까. 알아, 안다고. 그냥 생트집 잡는 이야기라는 걸. 근데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걸 좀 잘 못 본다. 분명 같은 캐릭터인데 교체 되는 거. 내가 그걸 좀 잘 못 받아들인다고. 잭 니콜슨 다시 데려다가 돈 쏟아부어서 디에이징 기술로 젊게 만드는 거, 아니면 아예 CGI로 잭 니콜슨과 셜리 듀발 다시 만들어버리는 거. 다 안 하느니만 못 했을 거란 걸 알아. 그냥 생트집 잡는 거야, 나도... 훗날 언젠가 <샤이닝>이랑 <닥터 슬립> 연이어서 다시 보게 되면 그것 때문에 좀 깰 것 같아서...
영화 초반, 주인공 대니는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알콜 중독 치료 모임에 나가게 된다. 그 곳 강단에 선 의사가 말한다. "우리에게 바꾸지 못할 것을 받아들이는 인내를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 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주소서" 영화 초반, 대니는 그 두가지를 구분해내지 못한다. 심지어 구분해내고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엔 대니도 용기를 내지 않나. 힘을 내 바꾸질 않나. 그게 이 영화의 전부였다 말하고 싶다. 알고보니 호러가 아니라 대니의 성장 드라마였다.
존나 웃긴 건... 전편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레전드이긴 했었잖아. 근데 40여년이 지나 나온 이 속편을 보니, 앞으로 이 속편이 없다면 전편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닥터 슬립>은 그야말로, 전편에 각주를 달아 정리하고 새 장을 맘껏 열어젖힌 속편이라 할 만하다.
뱀발 - 암만 봐도 결말부 대니의 모습은 포스의 영으로 산화한 오비완 케노비 같다.
덧글
로그온티어 2019/11/13 13:21 # 답글
그리고 혹 모릅니다. 20년 후, 다양한 스티븐킹 작품들이 나왔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작품이 나올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스티븐킹 영화 유니버스라 부르겠죠. 생각만해도 끔찍하단 걸 알지만, 왠지 지금 추세보면 안 그럴 것 같지도 않..
잠본이 2019/12/01 01:48 #
CINEKOON 2019/12/03 10:38 #
잠본이 2019/12/01 01:50 # 답글
CINEKOON 2019/12/03 10: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