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6 16:34

태풍, 2005 대여점 (구작)


뭘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겠다. 태국과 러시아 등의 해외 로케이션을 넘나들며 장동건과 이정재라는 자타공인 미남 배우 둘을 박아놓고 국제 정세 속 한반도에 닥친 테러 위기를 그려내는 액션 블록버스터. 캐릭터들과 그 사이 구도도 뭔지 알겠음. 장동건이 연기한 씬이라는 캐릭터는 참 멋질 수 밖에 없는 캐릭터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해적들의 대장인데, 여기에 잃고 떠나온 가족들에 대한 연민도 느껴지고 부하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의리와 리더십도 엿보이는 그야말로 간지 복수귀 캐릭터. 게다가 얼굴이 장동건. 이건 뭐 멋지지 않을 수가 없잖아. 여기에 이정재가 연기한 강세종도 대립각을 세우는 캐릭터로서 무엇을 추구했는지는 알겠다. 알겠다는 거다... 기본 구성은 나쁘지 않았다는 거다... 근데 대체 어떻게 이 영화를 조질 수가 있지.

이유는 간단한데, 런닝타임에 비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그 와중에 그 매력적일 수 있었던 캐릭터들을 뻔하게 소비해버리고 말았다는 점. 

아니, 막말로 총 1시간 40여분짜리 영화인데 영화 시작하고 30분 넘게도 내용 이해가 잘 안 간다. 과거 회상 포함해 영화 시작하자마자 독일에서부터 동남아 해상, 한국, 태국을 넘나들며 쉴새없이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캐릭터 구축과 이야기 전달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케이션을 마구잡이로 옮겨놓다 보니 대체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냥 감으로 알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대사도 존나 많아. 영화 시작하고 40분 동안 내용 이해가 채 안 된 상황에서 설명만 구구절절 대사로 다 하려든다. 장소 이동도 존나 많은데 캐릭터들도 존나 많고, 심지어 그 캐릭터들의 말도 다 존나 많아. 아니, 시발 대체 이게 뭐냐고.

그 연기력과는 별개로, 앞서 말했듯 씬은 나름 매력적인 캐릭터다. 흑화한 잭 스패로우처럼 보이기도 하고. 문제는 그와 대립각을 세우는 이정재의 강세종이다. 존나 매력없는 모범생 캐릭터. 포스터엔 '말이 통하고 가슴이 뜨거워져도 우리는 싸워야만 한다!'라고 쓰여 있는데, 그 카피와 클라이막스 결투를 잘 살리려 했다면 씬과 강세종 사이 피어나는 서로에 대한 연민과 우정 아닌 우정을 묘사해냈어야지. 정작 둘은 최종전 전 제대로 만난 것도 딱 한 번이다. 거기서 뭐 의미있는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그냥 세종이 일방적으로 씬에게 연민을 느낀다. 물론 안다. 씬의 누나가 어떤 처지에 빠졌는지도 봤고, 그 누나를 대하는 씬의 모습도 보았으니 연민이 들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걸 그냥 관객이 그러겠거니- 라는 생각으로 이해하게 놔두면 안 된다는 거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하는 싸움이라며. 그럼 세종이 씬의 기록을 보거나 그의 행적을 쫓으며 짝사랑 아닌 짝사랑 같은 연민의 감정을 느꼈어야 되고 또 그걸 잘 묘사해냈어야 하는 거잖아. 이 정도면 그냥 태업이다. 지금 버전으로만 보면 막판 클라이막스 전투 때 씬에게 느끼는 세종의 감정이 참 작위적임.

액션 블록버스터로써도 최악인데, 100분여의 런닝타임 동안 액션 장면이라고 할 만한 건 총 세 번 나온다. 부산에서의 카체이스, 안전가옥에서의 소규모 전투, 그리고 최종 해상 선박 전투. 근데 부산에서의 카체이스는 정말 박진감도 없고, 무엇보다도 그 물리적 비중이 몇 분 채 안 된다. 다 보고 나면 그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 게다가 장면 전환도 지나치게 빨라서 잘 안 와닿는 편. 안전가옥에서의 전투는 뭐... 이것도 워낙 감흥이 없는데다, 그나마 무언가가 느껴졌어야 했을 세종이 씬을 놓아주는 장면은 상술했던 단점처럼 캐릭터 사이의 감정 교류가 부족하게 느껴져 아예 안 와 닿는다.

해상 선박 전투는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려 했다는 게 느껴지는데, 여기서는 액션성이 미약하게나마 좀 살아나는 대신 캐릭터들이 무너진다. 뭐? 씬은 애초 그 폭탄들을 터뜨릴 생각이 없었다고? 그냥 우리 같은 존재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진짜 잣 까는 소리하고 있네. 잔인한 복수귀로서 그나마 매력있었던 씬의 캐릭터는 그 어중간한 최종 설정 때문에 다 날린 거다.

과거 회상도 뻔한 걸 무슨 15분 넘게 보여주고 있어서 편집의 흐름도 다 끊긴다. 아, 전체적으로 편집이 많이 모난 인상이다. 이해는 해. 로케이션도 많고 담을 것도 많은데 편집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겠지... 이해는 합니다, 이해는...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것을, 이후 나온 <베를린>이 다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너무 재미없어 힘든 영화다. 그리고 기껏 생각해낸 음모란 게 핵폐기물 폭탄을 풍선에 매달아 두 개의 태풍이 겹치는 순간 쏘아 올려 한반도 전역에 투하하는 거라고? 아니, 시발 무슨 음모도 기상예보 보고 꾸미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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