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7 15:25

아키라, 1988 대여점 (구작)


만약, 현재 시점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이 존재한다면 아마 <아키라>는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과 비슷한 느낌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장르나 외양 모두 판이하게 다른 두 영화이긴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해당 장르계의 장충동 족발집 같은 원조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다분하거든. <존 카터>의 원작 소설은 당대는 물론이고 미래에 줄줄이 나올 해당 장르계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었다. 하지만 정작 당 텍스트의 실사 영화화는 한참 늦었는데, 그러다보니 그 원작 소설에서 파생되어 만들어진 아류 아닌 아류작들을 먼저 접한 현대 관객들 입장에서야, <존 카터>가 클리셰 덩어리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미지들의 조각 모음집 정도 밖에 안 되었거든. <아키라>도 바로 그렇다. 이거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실사 영화화 된다고 하는데, 그거 먼저 본 관객들은 그 비주얼과 설정이 무난하게 느껴져 실망할지도. 그만큼 <아키라>는, 사이버펑크 폭주물의 원류 중 원류였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 다시 봤을 때도 그렇고... 내 취향에선 좀 먼 작품이다. 사이버펑크 장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이 폭주해 도시 날려먹는 이야기 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걸까. 아마도 깔아놓은 설정의 크기에 비해 제대로된 설명을 납득 가능하게 하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 영화를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삼았다 할 수 있을 <크로니클>을 참 좋아한다. 잠깐 비교해서 보면, <크로니클> 속 기본 설정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고, 설명이 전무한 것 역시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아키라>와 <크로니클>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거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둘 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건 맞다. 이야기와 설정이 말도 안 되게 허무맹랑하다 해서 그걸 내가 싫어하는 편은 아닌 거다. 다만, 그 설정의 정보량을 다루는 태도에서 좀 차이가 난다. <크로니클>은 영화 초반 주인공 일당이 정체불명의 괴물체와 조우하며 능력을 얻게 된다. 디자인과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무래도 외계에서 온 물체인 듯 하지만, 어쨌거나 영화엔 그 설명이 없다. 정말로 외계에서 온 건지, 아니면 국가의 비밀 실험에 의한 건지, 아니면 고대 문명의 잔해인지 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근데 그 영화에선 그게 말이 됐다. <크로니클>은 폭주하는 주인공들 사이의 갈등이 중요한 거지, 그 능력의 기원이 중요한 게 아니었던 영화였거든. 딱 거기까지만 보여줘도 됐단 말이다.

<아키라>는 다르다. 어쩌다 능력을 얻게 된 건지, 아니면 원래 그 능력이 테츠오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었던 건지는 상관 없다. <에반게리온> 마냥 기본 세계관 설정이 크고 깊은데, 거기에 대해서 별로 설명을 안 하는 느낌. 깔쌈하게 설정만 얇게 깔아주고 나머지 런닝타임 전체를 카네다와 테츠오의 갈등과 대결로만 그렸어도 난 좋았을 것이다. 허나 거기에 내 기준 쓸데없어 뵈는 게 너무 많이 끼어든다. 군국주의나 부패한 시스템에 대해 코멘트하고 싶었던 것이겠으나, 그 자체로 너무 하나마나한 소리처럼 느껴져 실패한 듯한 인상. 최고 간부 회의와 군부 사이 갈등이라든지, 마치 독립 투사들처럼 묘사되는 류의 일당들 이야기, 또 카네다 패거리와 크라운 패거리 사이의 경쟁. 이 모든 게 다 사족처럼 느껴진다. 정작 중요한 건 카네다와 테츠오의 관계 아니야? 그걸 두 시간 내내 보여줘도 모자랄 판인데 영화가 딴 데 너무 힘을 쏟는 느낌.

물론 안다. 그리고 이해하고 또 인정한다. 이 영화가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하는 방식.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들. 다 알겠다. 근데 그냥 내 취향이 아니라고. 난 원래부터 두 인물 사이의 관계가 점점 돌아서며 틀어지는 이야기들을 좋아해왔다. 그래서 더 아쉬워하는 거야, 그냥... 이건 내 블로그니까 그 정도의 투정은 부려도 괜찮잖아... 이외에도 '아키라'나 그 아래 실험체들을 설명하는 방식 역시 효과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뜬구름 잡기처럼 느껴진다. <에반게리온> 처음 봤을 때 안노 히데아키 연출 같음. 물론 그것도 이 쪽이 더 먼저겠지만.

다만 버블 시대, 모든 것을 갈아넣은 재패니메이션의 패기 하나만큼은 제대로 진수성찬인 영화다. 전체적인 비주얼이 놀랍고, 지금 시대에 봐도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게 경이롭다. 캐릭터 디자인이나 비클 디자인도 이 정도면 된 거지, 뭐.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아키라>가 연출과 작화만으로 열어젖힌 미래였다고 생각한다. 

뱀발 - 이 영화의 영향을 안 받은 작품들이 거의 없겠지만, 후반부 어느 장면 보면서는 놀란의 <인터스텔라>나 소니의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도 떠오르더라. 역시 고전은 시대를 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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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11/27 19:27 # 답글

    아키라를 보면서 든 생각은... 일본 창작자들은 블록버스터에는 재능이 없지만 그로테스크한 바이오호러에는 재능이 있다는 겁니다. 그나저나, 요즘 쓰시는 족족 상단 올라가는 걸 보니 저 이외에 애독자들이 늘어난 것 같군요!
  • CINEKOON 2019/12/03 10:33 #

    바이오 호러 제가 제일 싫어하는 분야... 사실 이 영화도 막판 테츠오 장면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상단 올라가는 기준은 조회수인가요, 역시? 애독자 늘어나면 좋긴 한데 아직은 언감생심 같은...
  • 코토네 2019/11/27 22:31 # 답글

    그러고보니 아키라의 스틸북 한정판 블루레이가 나오는데, 예고 뜨자마자 벌써 예약판매가 종료되어버렸더군요. ㅎㄷㄷ
  • CINEKOON 2019/12/03 10:34 #

    사실 거기 참전할까 했었는데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일단 다시 보자-라는 생각이 동해서 재감상 한 거였거든요. 결과론적으로는 불참...
  • 잠본이 2019/12/01 01:40 # 답글

    나우시카와 마찬가지로 원작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압도적인 부분만 추려와서 애니화하는 바람에 뭔가 미묘해진 느낌도 있죠. 근데 원작에선 설명을 잘해주냐 하면 그것도 좀 애매하지만(...)
  • CINEKOON 2019/12/03 10:34 #

    역시 그렇군요. 원작은 제가 읽어보지를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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