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 환경은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오직 '극장에서!'라는 한 단어로 답변할 것이다. 허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은 극장에서 보기가 뭐랄까- 좀 힘들더라고. 좀 유치한 이유지만, '내가 넷플릭스에 월 회비 갖다 바친 걸로 이 영화들 제작비 충당하는 건데, 왜 그걸 또 내가 돈 주고 극장 가서 봐야 하는 거지?'라는 복수혈전 마인드 때문에.
하지만 난, 잘 만든 좋은 영화라면 화면의 크기를 가리지 않을 것이란 것도 역시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일단 <아이리시맨>은 좋은 영화가 맞다. 물론 극장의 큰 화면으로 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 자명하지만, 그럼에도 TV나 모니터의 작은 화면에서 그 값어치가 떨어지고 또 그 빛이 바랠 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거실에 있는 TV로 감상한 것임에도 3시간 30분이라는 긴 런닝타임 동안, 난 단 한 번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영화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진정한 대작.
허나 그럼에도, 분명한 단점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역사 초창기에, 넷플릭스는 각 오리지널 영화의 감독들에게 제작적인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옥자>를 만든 봉준호가 당시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했듯이 넷플릭스가 상업 지향적 + 대중 지향적인 조언이나 제안은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각 감독들이 받아들이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고. 이러한 점은 감독을 비롯한 창작자들이 넷플릭스를 오아시스로 보게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각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의 대중적 선호도가 약해지게도 만들었다. 정말이지, 넷플릭스 초창기의 오리지널 작품들은 다 엉망진창 아니었나.
지금 현재 시점에서의 넷플릭스 정책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직도 창작자들에게 간섭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른다고. 하지만 이번 <아이리시맨>만 놓고 보면, 절대적으로 간섭 안 한 느낌이다. 마틴 스콜세지라는 올타임 거장의 브랜드 네임을 믿고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하여튼 바로 그 때문에, 영화가 너무 방만하게 느껴진다. 3시간 30분! 난 긴 영화들을 좋아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나 <킹콩> 같은 피터 잭슨의 긴 영화들도 좋아한다고. 그렇지만 조건이 있지. 긴 런닝타임 내내 영화적 밀도가 높을 것.
넷플릭스가 간섭 했거나, 아예 다른 영화사에서 이 영화를 제작했더라면. 아마 지금 버전의 영화에서 런닝타임을 최소 3,40분은 덜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실제로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너무 길다. 그냥 길기만 한 게 아니라 밀도가 좀 떨어진다. 영화 내내 쓸데없이 묘사되는 인물들과 사건들이 너무 많아 주인공 3인방 이야기의 응집력이 약해진다. 그냥 생략 했어도 되었을 부분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이는 단순 지루함으로도 귀결되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복잡성에 의한 방만함으로도 이어진다. 관객 입장에서야 외워야 될 이름들 투성이인데, 여기에 사건도 너무 많고, 심지어 이야기 전개가 딱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선형적 구성만 띄는 게 또 아니잖나. 분명 매혹될 수 밖에 없는 진정한 '시네마'의 자태를 한 영화인데, 그럼에도 지루함을 떠나 이야기가 안 와 닿는다. 진심인데, 정말로 런닝타임 중 최소 30분 정도만 덜어냈어도 괜찮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 밖에 연출이나 연기는 더 말할 것이 없지, 뭐. 고증에 맞게 꾸민 시대상이 훌륭하다. 그리고 높은 제작비의 이유가 된 디에이징 CG 기술 역시 돋보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눈치 채기 어려울 것 같은 기술적 성취다. 다만 오래 전부터 했던 이야기인데, 디에이징 기술은 배우의 얼굴만 젊게 만든다. 몸을 젊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뭐, 식스팩 복근이나 우람한 이두박근 등은 CG로 만들 수도 있겠지. 내 말은 배우의 체력적 한계를 말하는 것. 분명 젊은 로버트 드 니로인데, 뛰는 폼과 섰을 때의 자세 등은 분명 노인의 그것이다. 근데 뭐 이거야 현재 기술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니, 아마 배우의 신체를 개조하는 게 아닌 이상 미래에도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일 듯 하네. 아예 <소셜 네트워크>나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져>처럼 바디 더블 쓸 게 아니라면 말이지.
영화는 내내 극중 인물들의 부고를 전한다. 재밌는 건, 해당 인물이 채 죽기도 전에 관객들에게 그 부고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 조 페시가 각각 연기한 주요 인물 3인방을 제외하고 어떤 인물이 화면에 첫 등장 하게 되면, 그 아래 자막으로 그 인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가 나온다. 더 재밌는 건, 화면에 등장해 그 자막을 받게 되는 인물들의 얼굴 표정이나 상태가 하나같이 다 열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술잔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등장한다. 하지만 그 밑엔 자막으로 그의 부고가 뜬다. 또 어떤 사람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의자에 앉아 등장한다. 그리고 그 밑엔 어김없이, 그의 부고가 뜬다.
그리고 세 시간 반에 걸쳐 수십 명의 부고들을 연이어 받았던 관객들의 처지에, 영화 후반부 로버트 드 니로의 프랭크가 합류한다. 프랭크는 지미를 믿었고, 좋아했고, 가까웠고, 존경했고, 또 사랑했다. 하지만 러셀은 지미에 대한 프랭크의 그런 감정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프랭크에게 지미를 죽이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로버트 드 니로라는 대배우의 진가가 다시금 드러난다. 그 짧은 시간, 그 짧은 순간동안 불길하게 움직이는 조그마한 눈동자. 프랭크는 지미의 부고를 받은 것이다. 지미가 죽기도 전에, 프랭크는 지미의 사인을 알 것 같았다. 총격에 의한 사망. 그리고 프랭크는, 지미가 죽기도 전에 그를 죽인 그 범인 역시 알 수 있었다. 그건 프랭크 자신이었을테니까.
그래서 나는 <아이리시맨>이, 미처 닿기도 전에 통보 받은 부고들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삶에는 불가항력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강한 건 역시 '죽음'이겠지. 그런데 그 죽음을 미리 아는 것. 그게 좋기만 한 일일까? 남의 죽음들을 계속 보고 또 보내고도, 덩그러니 남아 그 삶을 여전히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외롭지 않을까. 그게 좋기만 한 일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는 프랭크가 지미의 아내에게 전화하는 장면,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저 보여 준다. 그래서, 그게 좋기만 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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