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30 16:16

크롤 극장전 (신작)


일단 설정이 좋다. 어차피 <죠스>나 <엘리게이터> 식의 뻔하다면 뻔한 동물 재난 호러이니 설정과 이야기는 콤팩트 할수록 좋은 거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도 알고 있잖아, 이런 종류의 영화에선 기깔난 이야기 구조와 메시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때문에 영화 시작하고 20여분만에 기초 셋팅을 끝낼 수 있었다는 점은 굉장한 장점이 된다. 폭풍우 + 식인 악어 + 지하실. 여기에 주인공이 수영선수라는 점까지, 기본 반찬은 충실한 편이다.

말했던대로 영화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초 셋팅을 끝냈다는 게 대단히 좋다. 단순히 호러로써의 장르 셋팅을 끝 마쳤다는 것 뿐만 아니라, 주인공 부녀 사이의 해묵은 감정과 과거 역사까지 언급해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그걸 어떻게 썼느냐-를 놓고 본다면 참 애매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태도는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주인공의 핵심적 갈등과 클라이막스 해결 능력이 빛 좋은 개살구 마냥 얇고 가벼워진 건 문제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보는 영화들에서 그런 장면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주인공이 결정적인 선택 또는 행동을 해야하는 순간에, 교차편집으로 과거의 주인공이 비집고 들어와 현재의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는 그런 장면 편집. 그걸 가장 잘 썼던 건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였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기억이긴 했지만. 하여튼 나도 그런 장면 연출을 굉장히 좋아한다. 근데 문제는, 유행처럼 트랜드가 돌고 있는 건지 뭔지 요즘 본 영화들에서 그런 장면이 너무 많이 보였다는 데에 있다. 근데 또 콕 집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제목이 떠오르진 않네. 하여튼 <크롤>의 후반부에서도 그런 장면 연출이 나오는데, 문제는 근래 들어 너무 많이 봤던 장면 연출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거기에 그 수가 너무 얕게 보인다는 점이 핵심적이다.

데스 롤이라 부른다고 한다. 악어가 턱의 힘으로 먹잇감을 잡은채 레슬링 기술 마냥 몸을 빙빙 돌리는 것. 그렇게 되면 먹잇감은 물 속에서 익사 + 골절 크리를 당하게 된다고. 그래서 데스 롤이라고 한다네. 문제는, 영화가 너무 순한 맛이라는 것이다. 제작이 샘 레이미고, 감독이 알렉산드르 아야면 훨씬 더 고어할 줄 알았지. 물론 나 고어한 거 싫어하긴 하는데, 그래도 이런 장르에서는 고어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명색이 야생 악어인데 물 속에서 주인공 어깨 문채로 빙빙 데스 롤을 돌리는데도 주인공이 멀쩡히 정신 붙잡은 채로 바닥에 떨어진 신호탄 주워 반격하는 묘사는 실로 어이가 없다. 고증을 떠나 극적인 긴장감이 좀 이상하다고.

그 외의 장면들에서도 고어함이 너무 적다. 악어가 손목을 덥썩 물었으면 후크 선장 마냥 손모가지가 날아가야 정상 아니야? 주인공은 거기에 힘줄까지 성했는지 악어 입 안에서 총의 방아쇠를 여러번 당겨낸다. 그리고 손 꺼냈는데 손 정상임. ......어차피 극한의 상황을 만드는 설정이었다면 주인공 부녀 신체를 좀 더 거덜냈어도 좋지 않았을까. 막말로 주인공 아빠는 뼈마디가 보이는 다리 골절에 한 쪽 팔까지 잃었음에도 멀쩡히 잘 다니는 모양새. 이런 장르에서의 신체 훼손 묘사는 단순 이미지 쾌감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에 또다른 텐션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으로써 쓰이는 것 아닌가. 근데 왜 안 썼냐고.

설정의 단순함과 수준급의 악어 CG 묘사. 저예산으로 찍은 영화였음에도 그 퀄리티에는 충분히 만족한다. 아니, 근데 호러 영화 아니랄까 봐 주인공들이 답돌이 행세하는 건 안 없앴네. 주인공은 파이프 라인 밖에서 휴대전화 줍고 거기서 112에 신고하고 자빠져있다. 악어가 한 마리든 두 마리든 일단 다시 안전 구역으로 돌아와 전화 걸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악어가 숨어 있는 그 바깥에서 경찰에 전화걸어 상황이랑 주소랑 이름까지 다 말할 셈이었나. 올 때 치킨도 사들고 오라고 배달 앱까지 쓰지 그래? 그 밖에도 멍청한 짓들을 좀 많이 해서 짜증스러웠음.

아, 그건 재밌었다. 주인공 부녀 둘 다 엄청난 결심으로 뭔가를 이룩해내면 곧바로 그 결실이 뒤집어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까스로 휴대 전화 주웠는데 뒤에 매복하고 있던 세컨드 악어에게 통수 맞질 않나, 큰 결심으로 밖에 나가 보트 탈환 했는데 보트 타자마자 다시 집으로 휩쓸려와 뒤집어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구조 헬기 보고 신호탄 쐈는데 악어가 들이닥치고. 진짜 둘이 운 좋다고 해야할지 재수가 없다고 해야할지.

덧글

  • 로그온티어 2019/11/30 19:29 # 답글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의 요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고 봅니다. 피라미드 때도 의외로 잔인한 장면이 드물어서 의아했는데, 크롤도 절제된 게 보였거든요. 생각해보면, 아야 감독은 커리어 시작부터 피라냐까지 고어 장면을 통한 신체훼손의 호러 하나만 바라보는 감독이었습니다. 고어장면의 선명함은 B급 매니아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스토리 텔링의 지루함에는 그 고어 매니아들도 엄지를 내렸죠. 크롤은 본인의 장기자랑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어느 공포영화 감독의 잔상인 겁니다. 성장의 태동이죠. 그리고 크롤의 성공은, "나도 잔인한 장면없이 스릴을 만들 수 있다!" 라는 자기증명서, 자격증 같은 것이겠구요.

    공포영화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 하는 지를 알고, 마스터한 뒤에, 그 스킬을 다른 장르에 접목할 줄 아는 감독들은 그냥 드라마나 찍던 감독과는 연출의 범위가 확연히 차이나죠. 제 생각에,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도 그런 역량이 있을거라 생각해요. 아직 부족하지만, 그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왜냐하면 피칠갑 호러는 환호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본인의 커리어 확대를 노린 커리어... 노후 대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CINEKOON 2019/12/03 10:31 #

    그래도 전 그 똘끼가 아주 없어질 거라곤 생각 안 했었어요. 명색이 악어 나오는 영화인데 이 정도로 신체 훼손 묘사가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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