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5 15:09

퓨리, 2014 대여점 (구작)


질감과 감촉으로 기억되는 영화들이 있다. 전쟁 영화 중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왠지 모르게 축축하고 젖은 느낌. 영화 초반 압도적으로 펼쳐지는 상륙 작전 때문이겠지.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처럼 베트남전을 다루는 영화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푹푹 찌는 듯한 더위와 습기가 내게 밀려오는 기분이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퓨리>는 꾸덕꾸덕한 진흙의 감촉이 당장에라도 느껴지는 영화다. 탱크의 무한궤도에 끼고 찌들고 덕지덕지 붙어버린 진흙의 질감들이 너무 잘 느껴지는 영화. 그래서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와 더불어 내가 탱크를 좀 좋아한다. 밀리터리 덕후까지는 아니라서 탱크의 자세한 기종이나 종류별 특징 같은 것들을 줄줄 나열할 실력은 안 되지만, 그냥 탱크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그 전투 방식이 너무나 단순하고 단단해서 흥미롭다. 때문에 탱크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 역시 꽤 좋아하는데, 재밌게도 본격 탱크 영화 답지 않게 <퓨리>엔 탱크 전투 장면이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당장 떠올려 봐도 결말부 최후의 전투는 탱크를 은엄폐물로 삼아 진행되었을 뿐 굉장한 활용도를 보여줬다고 하긴 어렵잖아. 애초 무한궤도가 박살난 상태로 치른 전투인데. 허나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의 탱크들이 기억에 남는 건, 그 앞에서 보여준 두 번의 탱크 전투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기계를 전후좌우로 요리조리 움직여가며 그 순간만을 위해 사는 남자들의 이미지. 지금 준비된 이 한 발로 적을 물리치지 못하면, 그 다음 순간엔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여느 전쟁이 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탱크라서 더 그 긴장감이 강한 것이다. 턴제 게임 같은 거잖아. 장전하는데나 조준하는데나 시간이 오래 걸리니, 이 한 발 일격필살을 쐈는데 그게 빗나가버리면 정말로 아차- 싶어지는 거지. 그 긴장감을, 샤이아 라보프가 연기하는 포수 바이블이 잘 표현 해낸다. 자기 딴에는 열불나게 쏘고 있는 건데 옆에서 누가 뭐라고 갈구면 그 땐 진짜 선임이고 나발이고 없는 거야, 그냥.

전쟁 영화가 이등병 신참 병사를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흔한 일이다. 전쟁에 익숙하지 못했던 주인공이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지독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때문에 이 영화 속 주인공의 기본 설정 역시 장르 클리셰로 뻔하다면 뻔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말했듯, 전형적이더라도 잘해버리면 아무 상관 없다. 데이비드 에이어는 언제나 그런 모습들을 잘 그려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닥쳐오는 상황들에 조금씩 젖어 결국 미쳐버리거나 과격해지는 인물들의 흔들리는 모습에 언제나 집중하던 감독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장기가 이 영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그 다음 작품도 개쩔 줄 알았지만 신병인 노먼도 그렇고,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퓨리의 멤버들 역시 하나같이 다 제정신 아니거든. 오랫동안 전쟁을 겪은 탓에 PTSD에 거의 절여져 있는 인물들처럼 기록된다.

하나같이 다 맛간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퓨리 멤버들에게 하나같이 다 정이 간다. 비교적 적절한 캐스팅도 한 몫 했다고 보고. 브래드 피트는 언제나 멋진 남자인데 여기에 츤데레까지 더해서 정말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냥 존나 멋지게 나옴. 여기에 샤이아 라보프와 존 번탈, 마이클 페냐의 캐스팅도 정확했다. 심지어 로건 레먼도 여기서 연기 잘 함. 물론 그동안 연기 못했던 배우는 아니었다. 다만 이런 역할에도 잘 어울릴까- 싶었던 거지. 근데 잘했으니 그걸로 됐다.

우직하게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영화. 마지막엔 불타는 결기까지 보여주는 영화. 전쟁 영화사의 다른 걸작들에 비하면 규모 면에서 비교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을 밀도 있게 잘 채워넣은 영화. 아, 생각해보니 이 영화 처음 봤을 때가 정말 웃김. 2014년 국내 개봉 당시에 나 군 복무 중이었거든. 그 때 군복 입고 보러갔었음. 심지어 휴가 나왔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근무 중이었는데, 사단장이 이 영화 먼저 보고 감명이라도 받았던 건지 버스 준비 해두고 부대 근처 극장으로 가 다 보고 오라고 하더라. 덕분에 군복 입은채로 그 때 당시의 전우들과 함께 가서 봤던 영화. 그래서 더 박력 넘치는 관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진짜 탱크 몰던 기갑부대였으면 더 몰입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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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12/05 16:10 # 답글

    재밌군요. 부대 영화 관람이라닠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해보면 사기증진에 딱 좋은 영화가 아닐까...
  • CINEKOON 2019/12/11 19:11 #

    하지만 결말이......

    높으신 분들은 임무 수행에 대한 의지와 그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 포스21 2019/12/05 18:32 # 답글

    이게 벌써 5년 이상된 영화였군요. ^^
  • CINEKOON 2019/12/11 19:11 #

    군 생활 중에 본 영화들은 정확히 기억하게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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