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8 18:35

나이브스 아웃 극장전 (신작)


질감으로 치자면 따뜻한 벽난로 앞의 안락 의자에 앉아 직물로 짜인 카펫에다 발을 비비며 듣는 이야기 같은 영화. 아가사 크리스티나 아서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들을 읽으며 상상했던 그런 느낌들이, 영화 곳곳에 잘 스며들어 있다. 그만큼 프로덕션 디자인이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지. 아닌 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 풍의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인데, 시간 배경은 현대라 등장인물들이 죄다 스마트폰 들고 구글이나 인스타그램 타령하고 있는 게 백미다. 


스포일러 아웃 !


결국은 가족주의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를 비롯해 그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의 표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다름이 아니라, 정말로 '가족'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화다. 트롬비 가문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가슴 속에는 칼을 하나씩 품은채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대한다. 허나 어찌되었든 그들은 모두 '가족'이다. 가족 같지 않은 가족. 그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마르타. 할런 트롬비의 간병인인 그녀는 그들에게 '가족'으로서 대우받는 듯 하다. 트롬비 집안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버릇이라도 되는 것처럼 항상 이렇게 말한다. '너는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같은 사람이야'라고. 혈연으로 뭉친 가족들 내에는 정치적으로 우파 지지자도 있고 좌파 지지자도 있다. 젊고 어린 사람들도 있고, 늙고 지친 사람들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오직 피가 섞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이 된 사람들. 이렇게 서로 다른 그들이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 가족처럼 대하는 마르타의 국적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남미 출신인 것만 알뿐, 그들은 마르타가 브라질에서 왔는지 우루과이에서 왔는지 잘 모른다. 어쩌면 별로 관심이 없다.

영화의 핵심 인물을 불법 체류 이민자 2세로 설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트롬비 가족들은 마르타를 '가족처럼' 대하지만 정작 그녀가 할런 트롬비의 유서 속 주인공이 되자 날카로운 막말들을 꺼내 그녀를 찌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 때만큼은 그들이 정말로 한 가족처럼 단합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현재 트럼프 행정부와 그를 지지하는 미국 시민들의 모습이다. 그들 내부엔 우파 지지자도 있고 좌파 지지자도 있을 것이다. 젊은 사람도 있고 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며 싸울 것이다. 하지만 외부 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침해할 것이 명백해지는 순간, 그들은 쉽게 단결을 이룩 해내고야 만다. 그러한 행동에 좌파고 우파고 정치색은 상관 없는 것이다. 영화는 트롬비 가족을 '미국인'으로도 놓고, 계급적으로 '부유한 사람들'로도 놓는다. 어차피 그 계급에 속한 이상 그들이 정치적으로 어느 당을 지지 하는가는 상관 없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다.

이런 메시지적 측면으로는 굉장히 시시적절한 텍스트다. 또 훌륭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더불어 배우들의 호연, 여기에 각종 추리 소설들을 떠올리게끔 하는 이야기의 구성도 좋다. 특히 용의자 중 한 명인 마르타를 이야기 초반부터 깊숙이 핵심으로 밀어 놓고 관객들에게 그녀의 모든 걸 다 오픈 한다는 점은 비교적 신선하게 느껴진다. 다만, 여기서 오는 단점도 있다. 난 카리스마 넘치는 명탐정 캐릭터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추리하는 과정을 더 즐기는 사람이다. 근데 의도적이게도 이 영화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명탐정 캐릭터를 중반부터 배제 시켜버린다. 아니, 완전히 나가 떨어지는 건 아닌데 존재감이 확 줄어든다고 해야하나. 피아노 건반을 치며 심문 당하는 용의자들에게 일일이 겐세이를 넣었던 카리스마가, 영화 중반부터는 완전히 사라진다. 물론 이어폰 낀채로 노래하는 모습 같은 건 좋아. 명탐정을 귀엽게 묘사하는 것 자체는 재밌었다. 하지만 명색이 명탐정인데, 안락 의자 탐정 마냥 막판에 술술 이야기 재조립해주는 것 외에는 별다르게 한 일이 없다. 심지어 핵심적인 증거라 할 수 있을 혈액 보고서도 자기가 마르타 뒷편에서 읽다가 뒤늦게 놀라서 어버버-함.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범인. 그 범인에 대한 설정도 문득 아쉽다. 크리스 에반스가 얄밉게 잘 연기하긴 하는데, 누가봐도 범인처럼 굴길래 한 번 꼬아서 당연히 아닐 줄 알았거든. 근데 알고보니 진범이었음. 두 번 꼰거라고 하면 할 말 없긴 하지만 그만큼 추리의 재미가 반감된 건 어쩔 수 없다. 더불어 마르타와 크리스 에반스의 랜섬 캐릭터에게 포커스가 많이 맞춰져 있다보니, 나머지 배우들의 존재감 역시 희미해지고 낭비된다. 화려한 멀티 캐스팅으로 채워 놓은 용의선상 치고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별로 없어뵈는 것.

분명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추리 장르로써의 질감도 살아있고,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이 좋으며, 주제와 메시지도 시의적절한 편. 허나 다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것은, 이런 장르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구심점이 되어야할 명탐정 캐릭터가 잘 기억에 안 남는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마르타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녀가 취한 행동들처럼, 선은 어느 상황에서나 옳은 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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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12/08 19:53 # 답글

    정치영화를 만들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군요. 리뷰 읽다보니, 이 영화는 추리영화에 대한 헌사격으로 만들었다기 보다, 추리물 형태의 SNL 스케치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영화 보러 가는 사람들도, (반쯤 장난삼아) 캡아가 욕하는 걸 보러간다는 반응만 줄줄이 나오는 걸 보면 SNL 느낌 맞는 것 같아요. 배우개그 좋아하는 SNL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SNL 스러운 냄새를 맡았으니. 심지어...

    추리영화의 향취에 이끌려 온 분들에겐 조금 미안할 작품이겠지만요. 그 매니아 분들은 얼마전 가이리치의 [셜록홈즈] 시리즈를 보고 속상한 기분이셨을 텐데... 그나마 [오리엔탈 살인사건]에서 그나마 기분이 좋았다가, [나이브스 아웃]을 보고...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라이언 존슨의 [브릭]이 나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신랄한 추리물을 만들었겠지! 라며 관람했더니 트럼프를 해머로 때리는 영화를 봐버린 겁니다. 나쁘지 않지만, 현실을 잊고 추리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던 추리 매니아들은 느닷없는 팩폭에 머리가 지끈했을 지도 모릅니다.

    노파심에 씁니다만, 비판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쓰는 거에요. 아마도 그랬을 분들이 있을까봐 심정을 대변해주려고 쓴 거지, 절대로 제 심경을 쓴 게 아닙니다.

    그나저나 불법체류자나 트럼프 드립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몇 년 동안 노인을 돌봤던 간병인이, 노인의 유서에 따라 유산을 받는 일이 터지는 바람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는 사건이 한번 있었던 것 같아요.
  • CINEKOON 2019/12/11 19:09 #

    아, 물론 제가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는 것이지 추리 미스테리 장르 영화로써의 정체성이 더 짙은 영화인 건 맞아요. 굳이 정치적인 메시지나 맥락을 따져 본다면 저런 식 일테고요.

    그나저나 최근 추리 미스테리 장르 영화들 중 괜찮았던 게 딱히 생각 안 나네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괜찮았지만 언급하신 <셜록 홈즈> 시리즈는 정말......
  • virustotal 2019/12/08 23:05 # 답글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위선입니다.

    아버지를 챙긴다고 하지만 간호 조무사가 더 챙기고

    돈을 받은 만큼만이지만


    애비가 싫다는 영화화니 돈 가지고 장난치고


    난민이니 불체자 옹호하다


    부모가 지 한테 안준다고 하니 게거품물고 외노자 out 불체자 꺼져 하는

    바로 위선 사라지죠

    특히 범인 챙기는척 하면서 더 위선 떨고


    이영화는 위선이 감당 못할수준이되면 이꼴이 난다는거죠



  • CINEKOON 2019/12/11 19:09 #

    그것도 맞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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