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0 03:34

결혼 이야기 극장전 (신작)


<결혼 이야기>라는 제목과는 상이하게, 니콜과 찰리가 겪어온 둘의 결혼 생활은 카메라가 담지 않은 영화의 바깥에만 존재한다. 영화 초반 스케치로 살짝 묘사 되기만 할 뿐, 둘의 결혼 생활 모습을 상세히 보여주는 과거 회상 장면 따윈 영화 속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정작 영화는 '결혼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갈라 서기로 마음 먹은 상태인 찰리와 니콜의 이혼 과정만을 담담히 보여 준다. 그런데도 왜 이 영화의 제목은 '이혼 이야기'가 아닌 '결혼 이야기'인가.

영화는 두 시간 내내 이혼의 과정을 성실하게 옮긴다. 국가마다 이혼하고 관련된 법과 그 과정이 서로 다를 것이라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의 그것과는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만약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미국인이라면. 특히 뉴욕과 LA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면 흡사 이혼 과정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내려도 될만큼 이혼의 절차가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건조하게 펼쳐진다. 그 정도로 영화는 이혼의 법리적인 절차에 집중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결혼 생활의 가장 차가운 그 순간에 결혼 생활의 가장 따뜻한 숨결을 불어 넣었다는 데에서 특이점을 갖는다. 이미 이혼하기로 한 사람들을 다루면서도 이렇게 결혼 생활을 따뜻하게 그릴 수도 있는 것이다.

둘은 결혼 생활 내내 서로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상대에게 주지 않았다. 만약 애초 니콜과 찰리가 합의한대로 변호사 대동 없이 이혼 절차를 마무리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원래 바람대로 평화롭고 고요했을까? 설사 그랬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하지 못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둘 다 끝끝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찰리는 비록 이혼으로 끝날지언정 둘의 결혼 생활 그 이면을 들여다볼 수 없었겠지. 니콜이 LA에서 살고 싶어했는지 조차 모른채 끝이 났겠지. 이것 역시 하나의 예일 뿐, 결혼 생활은 결국 둘만이 아는 것이기에 찰리 역시 니콜에게 말하지 못했던 여러 감정과 상황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변호사를 대동했기 때문에 이 모든 갈등과 비극이 시작된 것이라고 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이혼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영화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최소한 서로에게 솔직한 모습으로 끝맺어지는 마지막이기에. 때로는 헐뜯고 욕하고, 심지어는 입에 담지도 못할 저주까지 퍼붓지만 결국엔 그들 모두 서로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를 건네기 때문에. 몇 년에 걸친 그들의 결혼 생활은 여전히 영화의 저편 바깥에 있지만,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했을지, 어떻게 사랑했을지가 모두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정적으로 마지막엔 모두 솔직하게 끝나기 때문에. 그래서 영화 속 결혼이 더 아릿하고 또 온화하다.

영화적인 만듦새 역시 정말로 뛰어나다.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는 항상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드디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그 '커리어 하이'라는 것일까. 둘은 한 씬 내에서 여러 감정을 알뜰살뜰 모으고, 또 그것을 순식간에 나눠지는 컷 사이에서 변화구를 던지듯 바꿔내는 것으로 바로 그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 여기에 잘 짜여진 연출과 근사한 촬영이 있다. 영화 후반부 찰리의 LA 거처에서 10여분 간 펼쳐지는 둘의 대화 장면은 연출의 리듬이나 배우의 동선 블록킹, 촬영의 톤 앤 매너에서까지 그 어느 하나 모난 구석이 없다. 이 정도라면 최상급의 씬 스터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근본적으로 '좋은 각본'이 있다. 차갑고 날카롭게만 느껴지는 이혼이라는 소재로, 이토록 따뜻하게 결혼의 의미와 그 가치를 설파할 수 있는. 그리고 이 좋은 각본은 연출과 촬영, 연기에도 영향을 준다. 앞서 말한 찰리와 니콜의 후반부 대화 장면에서, 찰리는 내내 대화를 거부하는 듯한 인상으로 짐짓 도망치는 것처럼 방과 복도 이 곳 저 곳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니콜은 부드럽지만 추궁하는 톤으로 한껏 맞서며 꽁무니 빼는 찰리의 뒤를 쫓는다. 이것은 좋은 각본의 영향이 전체 프로덕션 과정 곳곳에 스며 들고 있다는 것의 증거다. 더불어 이런 이야기라면 보통 관객으로서 주인공 둘 중 하나에 더 마음을 준 채 그 한 명을 응원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가공할 밸런스로 그 중심점을 기어코 잡아내어, 보는 이의 성별과 가치관에 상관없이 주인공 둘 모두를 동등하게 저울질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점 역시 애초 각본이 좋았을 것이라는 반증.

이토록 좋은 만듦새를 가지고 있는 영화임에도 다 떠나서. 다 필요 없고, 사실 몇 장면의 이미지만으로도 마음을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영화다. 자신의 연기에 대한 찰리의 비평을 듣고 그 앞에서는 짐짓 괜찮은 척 했으나, 벽 하나를 돌아 옆의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눈물 흘리는 니콜의 눈물에. 마지막까지 전해지지 못하다가 우연히 읽게된 편지 아닌 편지에서, 이미 실패한 사랑의 약속을 읽으며 조용히 흐느끼는 찰리의 표정에. 그리고 그래도 살아가는 모습으로 끝내 마무리되는 둘의 모습에. 정말이지 나는 무장해제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겐 연말이 다 되어서야 뒤늦게 찾아온, 올해의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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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이글루스 알리미 2019/12/18 08:06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12월 18일 줌(http://zum.com) 메인의 [컬처]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zum 메인 페이지 > 뉴스 하단의 컬처탭에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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