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1 18:43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2015 대여점 (구작)


동화 속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들어갔다가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럼 이 영화의 수남이는? 수남은 돈 따라 자본주의 굴로 들어갔다가 제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행복해질 수는 없는,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에 불시착한다. 존나 웃긴 건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갔던 것이나 수남이 돈을 따라갔던 것 모두, 그게 나쁜 추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앨리스는 순수한 호기심 때문에, 그리고 수남은 그저 살기 위해서. 문명 사회에서 태어났으면 돈이 필요한 게 당연지사잖아. 근데 그거 좀 따라갔다고 이 꼴 나는 게 과연 맞는 거냐- 이 말이야.

엄밀히 따져봤을 때, 영화가 조준하는 것이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가 겨누는 진정한 타겟은, 바로 그 자본주의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단단히 버티고 있는 관료적 시스템이다. 제아무리 공기관 소속 상담사라고 해도, 상담이 필요해 찾은 사람 앞에서 귀 딱 닫고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하다 퇴근 시간에 맞춰 셔터 내리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영화가 이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출근으로 시작해 퇴근으로 끝나는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본다. 그것은 영화의 오프닝 뿐만 아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튀어나오는 도시 재개발, 구청 업무 시스템, 군대, 시위 조직, 병원 등의 키워드들. 그 모두에 이 시스템의 병폐가 서려있다. 

하나의 이야기로써도 굉장히 균질하고 안정적인 영화다. 수남이 겪었던 모든 일들은 결국 그녀의 기술 아닌 기술로 귀결된다. 앞에 두고 깔았던 떡밥들을 하나하나 성실하게 주워담는 후반부가 참 착하게 느껴진다. 더불어 켜켜이 쌓은 그녀의 감정 역시 관객의 가슴을 온전히 때린다. 그리고 얻은 하나의 이상한 교훈.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한다.' 역시 옛 어르신 분들 말씀 하나 틀린 게 없다.

보통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극 후반 수남이가 연이어 벌인다. 폭행 당했으면 불쏘시개 투척하기 전에 신고를 해야지. 납치 당해 감금 고문 당했으면 설사 사람을 죽였어도 일단 경찰에 신고 했어야지. 법리적으로 자폭에 가까운 결정이 될 수 있었다 해도 경찰에 일단 신고는 해야지.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이상한 나라의 극단적인 부분에서 오래도록 살게 되면, 저런 결정 내릴 수도 있었을 거라고 봐. 성실하게 일했던 사람이 성실하게 미쳐갈 수도 있다고 봐. 그게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봐.

덧글

  • 로그온티어 2019/12/11 19:04 # 답글

    예에에에전에, 어떤 이웃 A씨가 어떤 이웃분인 B씨를 술먹고 폭행했는데 그날 경찰이 와서 하는 말은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였습니다. A는 취중 난동을 잘 부리는 터라 경찰에게 많이 불려가곤 했는데, 그날은 엄청 심했기에 경찰이 참다못해 하는 말이었습니다. 헌데 경찰도 와서는 아무것도 못하길래 의아했는데 맞은 곳이 CCTV없고 정황증거만 있기에 함부로 경찰서에서 데려가지 못하더라고요.

    물론 영화를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나쁜 짓했다고 경찰 부르면 나쁜 짓한 사람 잡아가고... 그게 수월하지 않습니다. 경찰 시점에서는 소리들은 사람들만 있지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고 현장에 멍만 있다면 저 사람이 자해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잘못 판단하면 역으로 경찰이 시말서를 쓰거나 심한 경우 경찰을 반강제로 그만두게 될 수도 있죠. 일단 데려갈 수는 있지만, 구금하고 계속 조사하고 그런 건 못할 수도 있어요. 당시에도 그런 상황이라서, 맞은 사람이 '저 사람 하루라도 구금해달라고 지금 제정신 아니라고' 말하며 경찰에게 애걸복걸했던 기억이 납니다.

    뭐 현실은 그렇단 말입니다. 경찰이 무능한 게 아니라, 경찰도 알지만 어쩔 수 없는거죠.
  • CINEKOON 2019/12/11 19:04 #

    저도 반쯤은 그렇게 생각해서 '법리적으로는 자폭에 가까운 결정이 될 수 있었다 해도'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근데 그걸 떠나서 그냥 이 영화의 주인공인 수남은 이미 핀치에 몰릴대로 몰린 사람이라 그런 거 하나도 생각 못하고 그냥 앞만 봤을 것 같긴 합니다만.
  • 로그온티어 2019/12/11 19:05 #

    아아 그 말뜻이 그 말뜻이었군요.
  • CINEKOON 2019/12/11 19:08 #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뜨거운 다리미로 허벅지 지져지는 고문을 당했는데 경찰에 신고도 안 하고 ㅠㅠㅠㅠㅠ
  • 로그온티어 2019/12/11 19:16 #

    제 생각에, 묵인하는 게 천성이거나 아니면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제 경우, 저는 초등학생 때 맞으면서 자랐는데 정당하게 맞은 게 아니라 그냥 다양한 이유로 맞았거든요. 밥을 깨작깨작 먹는다던가, 아니면 게임을 못한다거나(?), 아니면 기침소리가 너무 커서 불쾌하다던가.

    그렇다보니 해방(?)되고 나서는 트라우마 비스무리한 게 생겼어요. 남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맞을 것 같고, 남이 나에게 큰 잘못을 하거나 폭력적으로 굴어도 내가 순응하는 자세를 한 동안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지금도, 만일 그 상황이 장기적으로 갔다면 저는 정말 바보거나 사이코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학습된 폭력이 무서운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으로 사람을 길들일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장래나 행동반경이 달라지는 거죠. 만일 천성이 자주 움츠러들고, 자기 고집이 없다면, 더욱 폭력을 당연시 여기는 성격 같은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도 내가 피해보거나 상처받은 것에 대해 화가 나고 분노가 나도, 어느 순간, 내가 더 잘못했다는 생각을 자연히 꺼내게 될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가끔 무서움을 느끼곤 해요.

    ...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걸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영감을 얻어가는 이야기라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사실 이 영화에 관심갔지만 안 봤는데, 이런 이야기가 꺼려지더라고요. 지금도 현실적으로 가혹한 폭력을 다룬 영화는 잘 못 봅니다. (B급식 폭력이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폭력 걸 사회고발식으로 다룬거요) 예전엔 자기연민에 빠져서라도 봤는데, 잊고 싶고, 이젠 밝아지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커서요. 컬트적으로 묘사해도 메세지가 남긴 영화는 날카로운 묘사를 잊지 않기 때문에 보다가 갑자기 트라우마 발작(?)이 생길 때가 있더라고요.
  • 로그온티어 2019/12/11 19:22 #

    세상에... 다리미로 지졌다니; 으악!

    그나저나 뜬금없게 2가지 생각나네요. [새크리터리]에서 다리미로 자기에게 상처주는 장면이랑 [호스텔]의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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