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 13:15

멋진 하루, 2008 대여점 (구작)


한국판 <비포 선라이즈>라고 할 수 있을까. 두 남녀가 하루를 빌미로 도시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수다 아닌 수다 떠는 이야기니까. 대신 존나 웃긴 건 두 사람의 관계 차이.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는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시작한 하루 여행이었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썸이라고나 할까. 근데 <멋진 하루>의 희수와 병운은 아니잖아. 이미 연애 했었다가 헤어진 사이인데다, 심지어 희수는 병운에게 예전에 빌려줬던 돈을 받으러 온 것. 

콤팩트 하면서도 기존의 낭만을 비튼 듯한 설정이 굉장히 좋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뒷받침하는 두 배우의 대단한 연기. 사실, 일상 연기라는 게 제일 어려운 법인데 이 영화 속에서의 전도연과 하정우는 그걸 거의 완벽하게 해낸다. 특히 하정우는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아마 하정우 본인의 성격과 제일 비슷한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작품들에서보다 이 영화 속에서의 모습이 훨씬 편안해보이거든. 왜 요즘은 이렇게 깨발랄한 캐릭터를 많이 안 하고 진지하게 무게잡는 것만 하는 걸까? 이런 거 한국에서 진짜 원탑인 것 같은데.

전도연의 희수와 하정우의 병운은 이미 헤어진 사이다. 그리고 영화는 두 시간의 런닝타임 동안 단 한 번의 과거 회상도 없이 진행된다. 그 때문에 그 둘의 과거 관계를 우리가 정확히 목도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희수가 병운과 사랑에 빠진 이유, 그리고 희수가 병운과의 이별을 결심한 이유는 아마 같을 것이다. 병운은 분명 매력적인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특유의 가벼운 느낌 때문에 한 치의 진지함이라고는 기대 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거든. 희수는 아마 그 때문에 병운과 헤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수는 이 멋진 하루의 시간 동안에 병운에게 다시 빠져들고 또 스며든다. 분명 이별의 이유를 알았었는데, 오히려 그 이별의 사유가 된 그 부분들 때문에 다시 매혹되는 경험. 이번엔 반대지. 그 둘의 연애는 희수가 병운에게서 빠져나오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희수가 병운에게 다시 스며드는 과정을 그린다. 이미 한참을 빠져나온 상태로 시작한 하루였는데, 이 하루가 끄트머리를 향하면서 정신차려보니 어느새 다시 스며들고 있어. 그게 참 웃기다.

결말이 재미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다시 일말의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해서 둘이 서로에게 한 번 더 사랑에 빠지는 결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정하게 뒤돌아서 끝내는 결말도 아닌. 한 때 나에게 전부였던 사람을 다시 한 번 더 재평가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엔딩. 어쩌면 그래서 더 현실적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희망적이다.

덧글

  • 로그온티어 2019/12/15 22:15 # 답글

    영화를 정말로 모를 때는 이 영화가 남자의 찌질함이 없는 리얼리즘적인 홍상수 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었죠
    물론 아주 모를 때 말입니다.
  • CINEKOON 2019/12/21 21:44 #

    그런데 어느 정도의 찌질함이 또 현실적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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