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 17:51

설국열차, 2013 대여점 (구작)


이것도 시즌용 영화라면 시즌용 영화인 걸까.

새롭게 찾아온 빙하기에 의해 단 하나의 열차에 인류의 전부가 내몰린 상황. 아니, 내몰렸다 보다는 갇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애초 남궁민수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것 역시 그 감금으로부터의 탈출이었으니까. 하여튼 봉준호 감독작 답게 영화는 철저한 계급우화다. 열차의 가장 뒷칸, 이른바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하층 계급이다. 건강 관리는 커녕 제대로된 식량 배급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앞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만 늘어난 상황. 그리고 그보다 앞칸에 탄 사람들은 그들을 핍박하고 통제 하려고만 든다. 심지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들이라고 욕하며 감시한다. 잠깐, 그럼 가만 생각해보자. 앞칸 사람들 시선에서 보면 어쨌든 꼬리칸의 사람들은 모두 무임승차자다. 게다가 정말로 그렇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들이라면, 그냥 그 꼬리칸을 전체 열차에서 분리해버리고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게 낫지 않을까? 맛과 식감은 더럽게 별로일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면 단백질 블록 만드는 수고로움도 한결 덜 수 있잖아.

하지만 앞칸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계급 구조에는 필연적으로 '아래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꼬리칸의 사람들이 인구와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폐쇄적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극단적으로 꼬리칸을 전체 열차에서 떼어버린다면? 그럼 그 때부턴 꼬리칸 바로 앞에 붙어있던 칸이 새로운 꼬리칸이 되는 것이고. 원래 계급 체계는 그렇게 유지되는 것 아니었나.

봉준호의 영화가 계급 구조를 다룬다는 이야기는 더이상 새롭지 않다. 별로 참신한 해석도 아닌 거다, 이제는. 허나 영화는 그 결말 때문에 봉준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특이점으로 남는다. 나는 이 영화가, 봉준호가 최초이자 최후로 꿈꾼 가장 순수한 희망을 다루고 있다 생각한다. 그의 영화들은 항상 계급 투쟁이었고, 결말에 이르러선 모두가 쌉쌀하고 아릿한 뒷맛만을 남겼다. 쉽게 말해 주인공들이 죄다 실패하거나, 성공했다 하더라도 부정한 과정으로 이룬 승리들이었지. <살인의 추억>에선 공권력의 무능함에 의해 희생된 일반 시민들이 존재했다. <마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영화는 심지어 막판에 주인공까지 돌게 만드는 엔딩이었지. <옥자>는? 미자가 옥자를 끝내 구해내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 되기는 하지만, 흡사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케하는 마지막 장면 때문에 내 기분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리고 <기생충>. <기생충>은 결말부 기우의 편지에 이르러 희망을 논하는가 싶지만, 결국 그게 헛된 망상에 불과할 것이라는 잠재적 선고를 내림으로써 더 큰 절망으로 관객을 내모는 영화였다. 

그렇지만 <설국열차>는 다르다. <설국열차>는 봉준호의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가장 순수한 희망을 설파하는 영화다. 우리 세대는 분열되어 서로 싸울 것이다. 이 체제를 유지할지, 아니면 극단적이고 과격 하더라도 아예 전부 부순 뒤 다시 시작할지를 두고. 그걸 두고 서로 피터지게 싸우겠지만, 가장 끝에 가서 우리가 껴안고 보듬는 것은 다름아닌 다음 세대다. 전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커티스와 후자를 부르짖는 남궁민수는 마지막까지 갈등 하고 싸우다가도 열차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면 결국, 두 말할 것도 없이 어린 아이들을 껴안는다. 어린 아이들은 다음 세대고, 다음 세대는 우리에게 희망으로 남는다. 그냥 죽으면 끝인 것을 왜 우리는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가. 그것은 우리가 낳은 우리의 아들과 딸들 때문 아닌가. 

그리고 봉준호는 마지막에 북극곰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희망에 방점을 찍는다. 여기엔 상승 기류를 바로 꺾어 더 큰 절망을 주는 <기생충>의 희망 고문이 없다. 두껍고 차가운 자본주의 현실에 돈이라는 최소한의 협상을 통하여 얻어낸 <옥자>의 합리화가 없다. 봉준호는 오히려 더 큰 세계로 나아간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마주하게될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국열차>를 끝낸다. 거기엔 그 어떠한 트릭도 없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봉준호가 만든 영화들 중 유일하게 희망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적으로 후반부 긴장감의 밀도가 떨어지는 건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좀 더 재밌게 만들 수 있었을 부분도 가끔 눈에 띈다. 때문에 봉준호의 영화들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 안에는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가 내내 마음에 남는 건, 봉준호가 보여준 바로 그 일말의 희망 때문이겠지. 내내 부정적이고 시니컬했던 사람이 간신히 내뱉은 희망의 말. 그래서 괜히 이 영화가 종종 마음 안에서 돌아다닌다. 열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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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12/15 21:50 # 답글

    이렇게 볼 수도 있군요... 허나 아나키즘적 해석으로도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풀 수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설국열차]는 캡틴 아메리카가 지옥철을 경험하고 Eat shit 을 외치며 모든 걸 폭발시키는 영화인 셈이죠. 마이클 베이도 폭탄 전문 감독이지만 사회 전반을 폭발 시킬 거라는 생각은 없었는데, 봉준호 감독은 그걸 해냈잖아요! 저는 이걸 보고 국위선양이라고 보았습니다. 좌니 우니, 혁명이니 지배니상관없이 사회는 폭발시켜야 제맛인 겁니다! (?)
  • CINEKOON 2019/12/21 21:45 #

    아, 물론 아나키즘적 해석도 충분히 설득력 있다고 봐요. 원래 좋은 텍스트일수록 다층적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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